영화 ‘다음 소희’는 아이들의 고통을 외면한 우리 사회 어른들을 향한 꾸짖음이다. 자신조차 무지한 어른의 지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감독의 자기반성이자, 각성이기도 하다.
‘다음 소희’(감독 정주리)는 당찬 열여덟 고등학생 소희(김시은 분)가 콜센터 현장실습을 나가면서 겪는 사건과 이를 조사하던 형사 유진(배두나 분)이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속에서 마주하는 강렬한 이야기를 그렸다. 지난 2017년 1월 전주의 한 통신사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학생이 스스로 세상을 등진 실화가 모티브다. 당시 특성화고 졸업을 앞두고 있던 여고생 고 홍수연 양은 저수지에 스스로 투신했다.
특성화고 졸업을 앞둔 소희는 춤추는 게 취미인 당찬 여고생이다. 대학 진학 대신 취업을 택한 소희는 담임 선생님 소개로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간다. 원래 자신의 전공인 애완동물관리과와 연관성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소희가 일할 곳이 ‘대기업 직영’임을 강조하며 끝까지 버티라고 연신 강조한다. 자신이 얼마나 그 일을 힘들게 구했는지, 이런 기회가 학교에 얼마나 흔치 않는 건지, 학교 취업률이 어떤지 장황히 설명하지만,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소희가 출근한 곳은 대기업 직영이 아닌 하청업체에 불과했다. 첫날 배치된 곳은 경력자도 어렵다는 해지 방어팀. 인터넷, 휴대전화를 끊으려는 고객들을 설득해 해지를 막는 일이었다. ‘나도 이젠 사무직 여직원’이란 설렘도 잠시 고객의 욕설, 참을 수 없는 성희롱에 소희는 큰 충격을 받는다. 월급도 기본 요건을 채우지 않은 실습생이란 이유로 계약서와 다른 터무니 없는 금액을 받았다. 퇴근 시간은 6시였지만 할당 콜 수를 채우지 못해 잦은 야근이 이어지면서, 소희는 시들어갔다. 버텨보려 발버둥 치지만, 차가운 어른들의 현실은 끊임없이 뒤통수를 날린다.
소희 사건을 담당한 형사 유진만이 유일하게 의구심을 품고 치열히 이를 파헤친다. 하지만 피해자가 있는 사건에 가해자는 없었다. 유진이 만난 대부분의 어른들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몰랐다’며 책임을 회피하기 바빴다. ‘취업률’을 충족하지 못하면 학교가 사라지며 직원들의 밥줄이 끊긴다는 하소연도 이어졌다.
영화는 수치화된 실적에 골몰하는 어른들의 성과주의, 책임 회피가 ‘소희’를 만들었고, ‘다음 소희’들을 양산할 것이라 경고한다. 실제로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수연 양의 죽음 이전엔 공장지붕에서 야간작업을 하던 대환 군의 죽음이 있었다. 수연 양의 죽음 이후엔 2019년 음료공장에서 일하던 민호 군, 2021년 요트선착장에서 일하던 정운 군이 하늘의 별이 됐다.
정주리 감독은 투박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터치로 영화의 무거운 주제의식을 다룬다. 실제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그리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유진의 목소리와 시선을 빌려 분명하게, ‘이 영화를 지켜보는 우리도 이 세상의 ‘소희’들에게 무지하고 무관심한 어른은 아니었는지‘ 되묻는다. 어두운 현실을 그렸지만, 소희의 입장을 헤아려준 ‘유진’이란 인물을 통해 희망을 전하기도 한다.
특히 배두나와 김시은 두 여배우의 열연이 모든 서사에 설득력을 불어 넣었다. 배두나는 전작 ‘도희야’에 이어 정주리 감독과 이번 작품으로 7년 만에 재회했다. 그는 타인에게 벽을 세우고 겉돌았던 유진이 소희의 발자취를 따르며 변화하는 과정을 세밀히 표현했다. 소희 역의 김시은 역시 첫 장편 영화 데뷔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해외에서도 호평 일색이다. 이미 지난해 국내 영화 최초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선정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후 아미앵국제영화제, 판타지아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 초청돼 수상 소식을 전하고 있다.
정주리 감독. 15세 관람가. 2월 8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