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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축구 한류’ 열풍이 다시 뜨겁게 불고 있다. 김상식 감독이 이끈 베트남은 최근 막을 내린 ‘동남아시아 월드컵’ 미쓰비시컵에서 6년 만에 정상에 올랐다. 과거 박항서 전 감독 시절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역이 축제 분위기다.
바로 옆 나라인 라오스에도 ‘작은 축구 한류’가 시작됐다. 주인공은 하혁준(55) 라오스 대표팀 감독이다. 하 감독의 라오스는 2024 미쓰비시컵 A조에서 조별리그 2무2패를 기록, 조 최하위에 그쳤다. 하지만 라오스 국민은 기뻐했다. 중요한 것은 두 번의 무승부였다. 127위 인도네시아, 150위 필리핀을 상대로 승점 1점씩 따냈다. 대회가 끝나고 라오스축구협회 관계자들이 하 감독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그들에겐 기적 같은 성과였다.
라오스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86위다. ‘축구 변방’ 동남아시아에서도 최약체다. 국가대표조차 전문 선수가 아니다. 라오스에도 축구 리그가 있긴 하다. 축구선수로 버는 수입은 월 20만 원 정도. 그래서 선수들 대부분 ‘투잡’을 뛴다.
인도네시아전에서 두 번째 골을 넣은 등번호 ‘10번’ 파타나 폼마텝은 본업이 택시기사다. 오전에 정해진 사납금을 채워야 오후에 공을 찰 수 있다. 미얀마전에서 두 번째 골을 기록한 토니 웬파세웃은 훈련을 마치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선수 대부분이 동아리 수준으로 축구를 배운 대학생이다.
홍콩 클럽팀을 맡다가 지난해 8월부터 라오스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하 감독은 “처음에는 막막했다”며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피지컬 코치 출신답게 우선 선수들을 모아 체력을 점검했다. 첫 테스트 결과는 한심했다. 우리나라 중학생 선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멘탈은 더 심각했다. 1~2골 먹으면 스스로 무너지고 지레 포기했다. 선수로서 자세가 전혀 되지 않았다.
하 감독은 걸음마부터 시작했다. 일단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체력을 키웠다. 쌀국수와 채소 위주 식단도 육류 등 단백질 중심으로 바꿔나갔다. 개인기, 팀 전술도 처음부터 가르쳤다.
무엇보다 선수들 마음을 얻으려 노력했다. 축구에 대한 동기부여가 없었던 선수들에게 목표를 심어줬다. “너희들 돈 벌고 싶지 않아? 축구로 부자 만들어줄게. 나만 믿고 따라와”라고 큰소리쳤다. 선수들은 처음에 믿지 않았다. 그래도 하 감독은 뚝심있게 밀고 나갔다. 승부욕과 투쟁심을 심어줬다.
라오스 선수들의 마음을 얻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연습경기에서 상대 팀 선수가 노골적으로 라오스 선수들을 무시하며 거친 파울을 범했다. 그런데도 라오스 선수들은 멀뚱멀뚱 가만히 있었다. 하 감독 표현대로 그냥 ‘착하기만 한’ 선수들이었다.
하 감독은 바로 경기를 중단했다. 상대 감독과 심판에게 소리를 지르며 따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하지만 라오스 선수들은 감동했다. 선수를 지켜주기 위해 열정적으로 싸우는 감독의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런 헌신적인 지도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후 라오스 선수들은 하 감독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따랐다. 감독과 선수가 하나가 되니 팀이 눈에 띄게 발전했다. 선수들 머리와 가슴에 승부근성이란 싹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미쓰비시컵에서 거둔 두 번의 무승부였다.
하 감독은 국내 축구계에서 잘 알려진 지도자가 아니다. 동아대를 졸업하고 실업축구 주택은행에서 2년 정도 뛰다 무릎 부상으로 일찍 선수 생활을 마쳤다. 일본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고 장쑤 쑤닝(중국) 피지컬 코치, 수원 삼성 피지컬 코치 등을 거쳤다.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 감독은 “인도네시아랑 3-3으로 비기니까 어떤 팬이 SNS에 ‘신태용 감독이 삼류감독한테 발렸다’고 댓글을 달더라”며 “내가 아직 삼류인가 보다. 더 잘해서 유명해져야 한다”고 말한 뒤 껄껄 웃었다.
하 감독은 라오스 선수들과 함께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 그는 “미쓰비시컵에서 얻은 교훈을 발판 삼아 올해는 더 크게 성장할 것”이라며 “남들은 비웃을지 몰라도 지금처럼 잘 준비하면 오는 12월 열리는 동남아시안게임(SEA게임)에서 결승 진출도 가능하다”고 언급했다.
하 감독은 오는 16일 라오스로 돌아간다. 설 연휴를 국내에서 보내고 조금 늦게 출국해도 되지 않냐고 묻자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할 일이 많다. 라오스는 쉬면 안 되는 나라”라며 “빨리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고 싶다”고 의욕을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