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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인물인 그에게 ‘한국이 일본을 이길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콜드게임으로 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고 답했다. 그때만 해도 ‘설마’라며 믿지 않았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한국은 일본과 경기에서 4-13으로 완패했다. 그가 말한 대로 콜드게임 패배를 면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오랜 기간 각종 스포츠 현장을 취재하면서 이처럼 무력감을 크게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한국 야구는 2000년대 르네상스를 활짝 열었다. 2002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에 이어 2006년 제1회 WBC에서 4강에 진출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선 기적 같은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세를 몰아 2009년 제2회 WBC에선 일본과 명승부 끝에 준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한국 야구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2010년대 들어 한국 야구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2013년 제3회 WBC와 2017년 제4회 WBC에서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2021년에 열린 도쿄 올림픽에서도 졸전 끝에 빈손으로 돌아왔다. 처음엔 ‘다음엔 잘하겠지’라고 위로했지만 이제는 이게 현실이고 실력임을 잘 알고 있다.
한국 야구의 영광은 이제 오래전 추억이 됐다. 국제 대회 성공을 바탕으로 외양을 잔뜩 키웠던 프로야구는 거품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수억원 연봉이 작아 보일 정도로 선수들 연봉은 천정부지로 올랐지만 정작 실력은 뒷걸음질이다. 기존 선수들이 나이를 먹어도 가치가 더 높아지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이들을 대체할만한 선수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대표팀만 봐도 그렇다. 젊은 선수들이 상당수 포함됐다고는 하지만 주축은 김광현, 양현종, 김현수, 박병호, 양의지, 최정 등 30대 중반을 넘긴 노장들이다. 2000년대 한국 야구의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들이다. 일본 언론에서 ‘아직도 이 선수들이냐’라고 비아냥대도 할 말이 없다.
한국 야구의 참패는 대표팀과 프로야구만의 문제는 아니다. 뿌리인 학생 야구는 오래전부터 위기론이 불거졌다. 학생 야구 일선 지도자들은 좋은 선수가 나오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입을 모은다. 여러 목적으로 시행된 제도들이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어서다.
2011년 주말리그 시행 이후 학생 선수들은 수업이 끝난 뒤에야 야구공을 만질 수 있게 됐다. 훈련 시간이 적으니 당연히 실력을 키우기도 어렵다. 한 중학교 야구부 지도자는 “예전보다 훈련량이 50%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경기는 주말에 치러야 한다.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 쉴 시간도 없다. 몸은 몸대로 힘들다. 혹사를 막겠다고 주말리그를 만들었는데 잘하는 투수가 매주 던지는 편법이 등장했다. 그런 악순환이 10년 넘게 반복됐다. 자연스레 한국 야구는 뿌리부터 시들어가고 있다.
그래도 야구선수를 꿈꾸는 선수는 실력을 키우고 싶다. 그래서 ‘과외’를 받는다. 이른바 ‘아카데미’라 불리는 사설 야구교실이다. 프로선수 출신 지도자에게 일대일 개인 레슨을 받으려면 월 수백만원씩 깨진다. 야구는 집에 돈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스포츠가 된 지 오래다.
한국 야구는 이번 WBC 대회를 통해 화려한 부활을 알리고 싶었다. 마음 떠났던 야구 팬의 발길을 다시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이번 WBC에서 우울하고 참담한 현실만 재확인했을 뿐이다. 프로와 아마가 머리를 맞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한국 야구는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