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특히 미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벼랑끝 외교를 통해 수차례 전쟁 위기까지 불사했다. 지난 1994년 미국이 북한에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요구하고 북한은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로 맞서며 북미간 갈등이 고조되던 1차 핵위기 당시, 박영수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은 판문점 남북 특사교환 실무회담에서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 전쟁이 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된다”는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위협에 나섰다. 그러나 이같은 위기는 결국 핵을 동결하고 경수로를 지원한다는 내용의 ‘제네바 합의’로 마무리됐다.
미사일 실험을 통한 북한의 벼랑끝 외교의 시작은 지난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북한은 북미간 미사일회담이 2차 회담 이후 교착상태에 빠지자, 당시 북미간 준고위급회담이 진행되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장거리탄도미사일인 대포동1호 발사에 나섰다. 미국을 타격할 수 있다는 능력을 시위하고 나선 것이다. 북한의 이같은 도발은, 이듬해 윌리엄 페리 미 대북조정관이 방북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과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 및 관계개선 계획을 포괄적으로 담은 ‘페리보고서’ 도출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은 벼랑끝 외교가 통하지 않을 때에는 곧바로 굴욕을 감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취소 가능성을 언급한 최선희 부상의 담화에 전격 정상회담 취소로 맞받았다. 벼랑끝 외교를 구사하다 되려 벼랑끝에 몰린 북한은 곧바로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앉을 용의가 있다”며 꼬리를 내렸다. 북한의 외교가 철저하게 실용주의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영국 주재 북한 외교관으로 탈북한 태영호 전 공사는 그의 회고록에서 ‘솔직한 척, 어리석은 척, 억울한 척, 미련한 척’ 등 어떻게서든 실리를 취하는 북한의 외교를 ‘저팔계식 외교’로 명명하기도 했다.
결국 북한의 외교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이라는 지향점에 맞춰 대내 상황과 대외 조건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냉전 당시 북한이 소련과 중국 사이 균형정책을 펼쳤다면 냉전 종식 이후 미국과 중국 사이 균형정책으로 중국에 대한 대항력을 확보하고 미국의 도움으로 경제발전을 이루겠다는 북한의 전략은 일관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서보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는 “냉전 이후 북한의 대외정책 목표는 대미정책에 응집돼 있다”며 “북한은 탈냉전기 들어 자국의 안전보장을 담보해줄 국가를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들에서 찾아야 하는 딜레마에서 체제생존을 위해 미국을 주 대상으로 집중 돌파전략을 취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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