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株소설]푸틴은 유가 상승에 베팅했다…전쟁을 걸고

고준혁 기자I 2022.03.16 23:25:23

전쟁 벌인 이유, 유가 하락 때만 경기 침체하는 러 경제 구조
세계 원유 11% 생산하는 러시아, 유가 ''플레이어''로 참여 가능
ESG 등에 당분간 유가 공급 타이트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일각선 유가 배럴당 200달러 전망하기도

[이데일리 고준혁 기자] 누구는 노욕이라 말합니다. 올해 한국 나이로 71세가 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서방국들이 해외의 외환보유고를 동결하는 등 초강력 경제 제재로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까지 처할 거면서, 굳이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일으켜야 했느냐는 비난입니다.

그러나 이 나이 많은 독재자는 한 가지 확실한 ‘전쟁 보험’을 들어놓은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망가진 공급망, 상승세를 타고 있는 인플레이션, ESG(환경·사회·지배구조)까지 서로 복잡하게 얽혀 나타나는 에너지 가격 상승입니다. 국제유가는 얼마 전 2008년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푸틴의 노욕엔 일말의 이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블로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AFP)
◇ 푸틴 지지율, 크림 반도 공격 후 경기 침체 때도 60%…“러는 제재 잘 안 먹히는 나라”

전쟁은 비이성적 행위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 독립을 선언했을 때만 해도 서방국가들은 러시아가 지금처럼 수도 키이우까지 군대를 밀고 들어올 걸로 보지 않았습니다. 동부의 친러세력을 대신 앞세워 우크라이나 정부를 흔들어놓는 방법을 쓰겠거니 했습니다. 러시아는 그간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점령했지만, 어디까지나 친러 세력이 존재했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우크라이나 본토 침공은 그동안의 러시아가 일으킨 군사 분쟁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여겨집니다. 푸틴이 너무 늙었다느니 분노조절 장애가 있다느니 하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정말 푸틴이 미쳐서 이번 침공을 단행했을까요. 앞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병력을 빼 중국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 미국의 움직임을 주시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핵무기가 있는 러시아는 상호확증파괴(MAD) 핵억지 전략이 통할 걸로 보고 전쟁을 단행했을 수 있습니다. 실제 미국을 포함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는 우크라이나가 비(非)나토국이란 이유로 전쟁 물자만 지원해 주는 등 군사력을 직접 동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푸틴 대통령 지지율 추이. (출처=레바다 센터)
푸틴은 내부 단속도 잘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데이터 업체 레바다 센터에 따르면 푸틴의 지지율은 지난 2000년 대통령 취임 직후 80%를 넘긴 뒤 약 60%를 밑돈 적이 없습니다. 2014년 크림반도를 공격했을 땐 지지율은 61%에서 86%까지 수직 상승했습니다. 가장 최근 데이터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 2월에도 지지율은 전달 60%대에서 70%에 육박한 수준으로 상승했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배리 이키즈 경제학 교수는 서방 측이 러시아를 고립시키기 위해 각종 경제 제재를 가해 국민들이 푸틴에 반기가 들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과거 크림반도 사태를 미뤄 보면 실현될지 의문입니다. 당시도 각종 제재로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며 2015년과 2016년 러시아 GDP는 약 1300조달러를 기록, 2300조달러였던 2013년에 비해 거의 반토막이 났습니다. 러시아인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차피 지지율은 60% 밑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러시아 국내총생산(GDP) 추이. (출처=구글)
당시 러시아 경제가 고꾸라진 게 서방의 제재 때문이 아니란 사후적 평가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경제 규모가 작고 이미 침체된 터라 당최 제재가 잘 먹히지 않는 국가란 분석이 나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크림반도 사태 당시 러시아의 경기 침체는 유가 하락 때문이라고 일축했습니다. 뒤집어 보면 제재를 안 받았어도 경기는 안 좋았을 거란 얘깁니다. 이는 푸틴을 흥분시켰을 겁니다. 핵이 있어 미국과 싸울 일도 없고 무슨 짓을 해도 지지율은 60% 이하로 빠지지 않는데, 러시아 경제가 제재에 큰 영향이 없다는 분석까지 국제기관이 해주니 말입니다.

◇ “러 경제 제재 손해, 유가 상승이 일부 상쇄시킬 것”

이제 단 하나의 판단만 남았습니다. 기름값입니다. IMF가 말했듯 러시아에 유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2019년 러시아 GDP의 60%가 에너지 수출에서 나왔습니다. 러시아 GDP가 최악이던 2015년과 2016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은 배럴당 30~50달러선에서 움직였습니다. 2014년 100달러 위에 있었던 데 비해 큰 폭 하락한 것입니다. 2020년 팬데믹 이후 WTI는 20달러에서 작년 연말 90달러까지 상승했습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결심했다는 걸 보면 그는 웬만해선 유가가 하락하지 않겠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 추이. (출처=세인트루이스 연방은행)
푸틴은 러시아가 직접 에너지 가격을 움직이는 플레이어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가의 하방 경직성을 확신했을 수 있습니다. 러시아는 세계 원유 생산량의 11%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공급을 줄이면 가격은 올라갑니다. 이를 이용해 전쟁 전 몇 차례 테스트도 마쳤습니다. 새로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인 노르트스트림2의 허가권을 놓고 러시아는 유럽에 천연가스 공급을 줄여 잦은 가격 폭등을 일으키고 있단 혐의를 받았습니다. 러시아는 유럽이 쓰는 천연가스의 약 40%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전쟁 이후 서방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역시 전체 공급을 줄여 최소한 가격 상승을 일으킵니다. 매출은 물건의 수량(Q) 곱하기 가격(P)인데, Q가 줄어도 P는 상승해 매출이 급감하는 상황은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원자재를 사다 쓰는 유럽에 오히려 더 손해이기도 합니다. 실제 미국은 애초 유럽과 함께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 조치를 하려 했지만, 결국 단독 제재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40년 만에 최고 수준에 도달해 골치가 아픈 미국도 러시아산 원유 제재가 힘든 건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은 원유 확보를 위해 그간 사이가 좋지 않았던 베네수엘라와 사우디아라비아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습니다. 자그지트 차다 영국 국립경제사회연구소(NIESR) 이사는 “경제 제재로 인한 러시아의 타격은 가스 및 석유 가격의 상승이 부분적으로 상쇄시킬 것”이라며 “오히려 유럽연합(EU)에서 상당히 더 강한 인플레이션을 수반하는 경기 침체 가능성이 증가한다”라고 말했습니다.

◇ 화석연료의 마지막 시대, 유가 상승은 필연적…“높은 가격이 높은 가격 치유하는 수밖에”

에너지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란 예상엔, 이같은 수급적 요인 외 좀 더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일주일 전만 해도 130달러를 넘었던 WTI는 15일(현지시간) 96달러선까지 하락했습니다. 뒤늦게 코로나19가 확산하고 있는 중국의 셧다운과 베네수엘라 원유 공급 기대감 등이 유가 하락을 촉발했지만, 변동 폭이 큰 건 가수요와 투기적 수요가 많은 원자재 선물의 원래 특성 탓입니다. 푸틴 입장에선 변동성이 있는 에너지 가격이 상승한다는 베팅을 단순히 본인들이 시장을 움직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기엔 불안할 수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생산량은 러시아와 맞먹고 미국은 세계 최대 원유 생산 국가입니다. 중장기적이고 추세적으로 에너지를 상승시킬 요인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그 카운트 추이. (출처=와이차트)
화석연료의 공급은 매우 타이트한 상황이고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몇 년 전 미국의 셰일 혁명 이후 원유 생산자들엔 ‘덜 생산해 적정 가격을 유지하자’는 관성이 생겼습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억눌렸던 소비가 폭발하면서 에너지 수요도 갑자기 늘었지만 관성은 생산 증대를 억누릅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결정적인 복병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화석연료 사용을 죄악시하는 풍토는 에너지 업계를 더 위축시켰습니다. 친환경 재생 에너지를 선도하며 올해 원자력 발전소를 완전히 없애는 독일이 난처한 이유입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얼마 전 지금이 비상 시기라며 얼마간 화석연료 사용에 관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얄미운 푸틴을 도울 화석연료 가격 상승을 막을 방법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높은 가격은 수요를 억누른단 점에서 오로지 지금보다 더 높은 유가만이 날뛰는 유가를 낮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임계점이 어디인진 아무도 모릅니다. JP모건은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 레콘 롭 웨스트란 회사는 200달러까지 오르리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데릭 브라우어 파이낸셜타임스(FT) 에너지 에디터는 “유가 상승은 전기차 전환을 빠르게 하는 등 높은 가격은 높은 가격이 치료하겠지만, 수요를 파괴하는 값이 무엇인진 아무도 모른다”라고 전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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