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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 행복하길” 유언 남기고 DJ 곁으로
이 여사는 이날 밤11시37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유족들이 곁을 지키는 가운데 편안하게 97세 일기를 마쳤다고 김성재 이 여사 사회장 장례위원회 집행위원장이 11일 밝혔다.
김 위원장은 이 여사의 유언도 전했다. 이 여사는 “우리 국민들께서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제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하다”며 “우리 국민께서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특히 이 여사는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 위해 기도하겠다”고 작별인사를 했다.
정치권에선 십 년 먼저 세상을 떠난 김 전 대통령과의 해후를 기원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 삶을 기리면서 김 전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1922년9월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현 이화여고),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마친 ‘엘리트’ 여성이었던 고인은 1962년 가난한 야당 정치인이었던 김 전 대통령과 결혼했다. 부인과 사별하고 두 아들(홍일, 홍업)과 심장병을 앓는 여동생, 어머니를 뒀던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주위에선 극구 만류했지만 고인은 김 전 대통령 아내이자 동지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김 전 대통령이 군부정권의 탄압에 맞서 싸우고 국가 지도자로 서기까지, 이후에도 국민적 존경을 받으며 생을 마칠 때까지 함께 했다.
김 전 대통령과의 반평생은 1997년 대선 승리 전까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고인의 강인함은 더 빛났다. 야당 유력 정치인으로 거듭난 김 전 대통령이 1972년 박정희정권의 ‘10월 유신’ 뒤 국외망명했던 때에 “한국을 대표해 더 강한 투쟁을 하라”고 몰래 편지를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1976년엔 김 전 대통령 등과 함께 유신정권을 비판한 구국선언으로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전두환정권에선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고인은 정권과의 타협을 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김대중은 이희호로부터 태어났다’고 할 정도로 김 전 대통령에게 영향을 끼친 분”이라면서 “강직하게 김 전 대통령에 옳은 길, 민주화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채찍질을 했고 하나도 일탈하지 않도록 지켜보고 지켜준 분이었다”고 고인을 회고하기도 했다.
◇여성운동가로 큰 족적…DJ정부 여성인권신장 공로자
남편과 함께 민주화투사로 살았던 고인은 여성운동가로서의 족적도 남겼다.
고인은 가부장제가 공고했던 1950년대에도 대한여자청년단, 여성문제연구원 등 여성문제를 다루는 단체를 만들며 여성 권익 신장 운동을 벌였다. 미국 유학길에서 돌아온 1958년엔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여성 권리 쟁취 운동을 이어갔다. 결혼 후에도 고인은 여성문제연구원에서 이름을 바꾼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을 맡아 여성운동을 전개했지만,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1970년대엔 잠시 활동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여성운동가로서의 소명의식은 여전했다. 김 전 대통령이 낙선했던 1987년 대선 때엔 직접 마이크를 잡고 유세를 벌이기도 했는데, “여자가 마이크 들고 대중연설하는 건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주변인들의 말에 고인은 “지금은 여성이 마이크를 들어야 하는 시대”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이석현 민주당 의원은 “여사께서 ‘나는 김대중 후보 아내로서 이 일을 돕는 것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마이크 들고 다닌다’고 했다”며 “여성과 정의를 위해 외치던 분”이라고 추억했다.
김대중정부 들어서 여성 인권이 크게 개선된 것도 고인의 영향이다. 김대중정부에선 여성 장차관 수가 늘었고, 처음으로 여성가족부가 만들어졌으며, 남녀차별금지법도 제정됐다. 이 여사가 이사를 역임했던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이 여사님이 있어 대한민국의 여성운동이 지금과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며 “이제는 별이 되신 여사님을 추모한다”고 추도문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