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혜선 기자]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발생한 대규모 압사 참사에 ‘누군가 고의로 밀었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군중 안전 전문가들은 이번 참사가 고의적인 힘에 발생했다기보다는 특정 공간에 임계치 이상의 인파가 몰리며 ‘군중의 유동화’가 발생해 일어난 것으로 봤다.
사고 원인 규명 나선 경찰...‘고의로 밀었다’ 증언도
수사 당국은 핼러윈 행사를 앞두고 지난 29일 밤 발생한 압사 사건의 원인을 찾기 위해 관련자 진술과 영상 자료 등을 확보하고 있다. 총 475명으로 꾸려진 수사팀은 목격자와 사고 현장에 설치된 52개 CCTV 영상을 분석 중이다.
현재까지 이태원 압사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총 154명(외국인 26명)으로 확인됐다. 중상자는 33명, 경상자는 116명이다. 이날 사고는 폭 3.2m의 좁은 골목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뒤엉킨 상황에서, 도미노처럼 사람들이 넘어지며 발생했다.
사고 이후 목격자들은 ‘토끼 머리띠’를 한 인물이 고의로 군중을 밀었다는 증언과 5~6명의 무리가 군중을 밀었다는 증언 등을 내놓고 있다. 사고 발생 골목 위쪽에서 ‘밀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는 증언도 있다.
군중역학 전문가 “고의로 밀어 참사 발생 어렵다”
그러나 군중 역학 전문가인 밀라드 하가니(Milad Haghani)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 박사는 단 몇명이 군중을 떠미는 것으로는 참사가 벌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it is unlikely)’고 말한다.
31일 하가니 박사는 이데일리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1㎡당 8~10명이 밀집하게 되면, 군중은 자기 스스로 움직임을 통제할 수 없고 ‘연속적인 신체’처럼 행동하게 된다”며 “몸이 밀착되면서, 어떤 난류라도 충격파처럼 전파돼 사람들이 넘어지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밝혔다.
하가니 박사는 이러한 상태를 ‘군중의 유동성’ 상태로 정의했다. 그는 “군중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밀고 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꼭 그렇지 않다. 아무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아도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사고가 발생한 이태원 거리는 폭 3.2m의 협소한 골목으로, 면적은 180㎡ 정도다. 이 골목에 1800명의 인파만 몰려도 ‘군중의 유동성’ 상태가 된다는 얘기다. 사고 당시 이태원에는 1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누군가 고의로 밀어 수백 명 압사라는 대형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적다는 게 하가니 박사의 설명이다. 하가니 박사는 “임계 밀도 수준에 도달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한다면, 6명의 개인이 그러한 참사를 일으킬 수도 없고 시도해도 불가능할 것”이라며 “앞서도 언급했듯 군중이 유동성 상태가 되면 충격파가 퍼질 때 누군가 의도적으로 밀친다고 느낄 수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고 했다.
하가니 박사의 이러한 설명은 또 다른 미 군중 안전 전문가 키스 스틸(G. Keith Still) 영국 서폭대 교수의 것과도 일치한다. 스틸 교수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군중의 ‘실패 행동’은 항상 사고와 사건의 주요 원인은 아니며, 공통적인 요인 중 하나는 ‘부적절한 공간 활용’이다”라며 “군중의 힘은 저항하거나 통제하기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관련 당국의 ‘통제’가 사고를 막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하가니 박사는 “내 생각에는 능동적인 모니터링과 통제가 가장 중요하다”며 “사전에 군중이 얼마나 모일 지 추정할 수 없더라도, 실시간 CCTV 영상 등을 활용해 밀집 정도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밀도 수준이 너무 심각해지면 당국에서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매우 간단한 솔루션이지만 잠재적으로 이러한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하가니 박사는 “군중이 으스러지는 상황에서 개인이 스스로를 구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군중이 유동성의 상태에 도달하면 개인이 더 이상 자신의 신체 움직임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행사 주최측이 더 나은 관리로 이런 사고를 예방하는 것이 유일한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전했다.
[검증 결과]
대체로 사실 아님. 군중 역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대규모 인파가 특정 공간에 모였을 때 압사 사고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으며, 군중 속 개인은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수 없다. 이태원 압사 참사의 원인은 아직 경찰 당국의 조사가 진행중이지만, 압사 사고의 주요 원인은 ‘부적절한 공간 활용’에 있다는 게 전문가의 공통 의견이기 때문에 ‘누군가 고의로 밀어서 이태원 압사 참사가 발생했다’는 주장은 대체로 사실 아님으로 판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