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에도 재산 운용…자기신탁, 상속·재산관리 새 해법"

성주원 기자I 2025.08.13 14:20:03

고령화·복합자산 시대, 상속·유언 보완 필요
위탁자 사망 후에도 재산 자동 관리·배분
강제집행 회피·검인 절차 생략 등 장점 뚜렷
사해신탁 제한 등 제약…승계수탁자 지정 필수

[이데일리 성주원 기자] 고령화와 복합 자산 보유 증가로 생전과 사후 재산관리를 동시에 설계하려는 수요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신탁’이 상속, 증여, 유언의 한계를 보완할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제기됐다.

자기신탁은 위탁자가 스스로를 수탁자로 지정해 특정 재산을 관리·운용하는 법률관계다. 위탁자가 사망한 뒤에도 신탁 목적과 구조에 따라 재산이 자동 관리·배분되도록 설계할 수 있어 분쟁을 줄이고 재산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다.

안경재 변호사가 13일 서울 강남구 섬유센터빌딩 법무법인 바른 회의실에서 자기신탁선언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성주원 기자)
“사망 후에도 사전 규칙에 따라 재산 운용·배분”

오영표 변호사(신영증권 헤리티지솔루션본부 전무)는 13일 오전 서울 강남구 섬유센터빌딩 법무법인 바른 회의실에서 ‘자기신탁의 구조와 실무’ 발표를 통해 “자기신탁은 위탁자가 사망한 뒤에도 사전에 정한 규칙에 따라 재산이 운용되고 배분된다”며 “상속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을 예방하고, 재산을 채무와 분리해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위탁자가 판단 능력을 상실했을 때를 대비해 반드시 승계수탁자를 지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신탁선언에 대해 발표에 나선 안경재 변호사(공증인 안경재 사무소 대표)는 “미국에서는 생전 신탁(Living Trust)이 검인(Probate, 유언의 효력을 법원이 확인하는 절차)의 복잡성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발달했다”며 “우리나라에서도 자기신탁선언이 재산 독립성과 검인 회피라는 점에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100억원 이상 자산가뿐 아니라 사업 리스크가 큰 경우나 고액 연예인·스포츠 스타 등이 잠재적 활용 대상”이라고 덧붙였다.

자기신탁의 구조는 다양하다. 위탁자와 수탁자가 동일한 경우, 위탁자·수탁자·수익자가 동일한 경우(한국에서는 불가), 또는 위탁자·수탁자·수익자가 동일하되 다른 수익자를 함께 두는 경우가 있다. 신탁법은 자기신탁 설정 시 공정증서(공증인이 작성·확인하는 공식 증서) 작성 의무를 두고, 해지권 유보 금지(신탁을 설정한 사람이 운영 중 신탁재산 전부를 임의로 회수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를 명시한다. 이는 강제집행 회피를 막기 위한 장치다. 또 수탁자가 단독 수익자가 될 수 없도록 해 수익자의 감시권을 유지하도록 했다.

장점 뚜렷하지만…법적 제약·비용 부담 고려해야

전문가들이 꼽는 자기신탁의 장점은 명확하다. 신탁재산은 위탁자·수탁자의 개인 채무와 분리돼 강제집행을 피할 수 있다. 또한 유언 집행 시 법원의 검인 절차 없이 재산 이전이 가능하다. 신탁 목적 범위 내에서 부동산 매도, 주식 투자, 예금 운용 등 유연하게 자산을 재편할 수 있다. 사전 설정된 규칙에 따라 재산이 배분돼 상속 분쟁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 뿐만 아니라 생활비·병원비 인출이 가능해 노후·간병 계획과 연계할 수 있다.

그러나 제약도 존재한다. 채권자 회피 목적의 사해신탁(채권자를 해하는 목적으로 한 신탁)은 무효다. 해지권 유보 금지 규정에 따라 신탁재산을 전액 회수할 수 없고, 일부 인출은 생전수익권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 수탁자 감시 약화를 막기 위해 공동수익자 구조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위탁자 무능력이나 사망 시 원활한 재산 관리를 위해 승계수탁자를 반드시 지정해야 한다. 공정증서 작성비와 신탁운영비 등 비용 부담도 고려해야 한다.

노후·상속 설계에 활용…확산 가능성도 높아

실무에서는 고령자가 자기신탁을 활용해 노후 생활과 상속 설계를 병행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오 변호사는 이날 강연에서 아파트와 주식을 자기신탁에 편입한 뒤 매각 대금을 예금과 주식으로 재구성하고, 생활비와 간병비를 예금에서 인출하며, 사후에는 사전 설계한 비율대로 자녀와 손주에게 배분하는 방식을 소개했다. 그는 “아파트를 매각해도 매매대금을 신탁재산으로 인정받아 동일한 신탁재산성(신탁재산이 다른 재산으로 바뀌어도 동일한 법적 성격을 유지하는 원리, 신탁법상 ‘물상대위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 변호사는 자기신탁의 확산 가능성도 높게 평가했다. 그는 “변호사·공증인·금융기관이 함께하는 협업 모델이 가능하다. 변호사회, 은행 프라이빗 뱅커(PB), 보험설계사 대상 강의와 국회 포럼 등 홍보 활동이 필요하다”며 다음 달 국회에서 관련 포럼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자기신탁이 상속 설계, 채권자 보호, 재산 운용의 측면에서 제도적 장점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제도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실제 수요에 맞는 설계가 이뤄져야 한다고도 했다. 자기신탁이 미국의 생전 신탁처럼 한국에서도 널리 활용되려면, 제도 이해 확산과 실무 표준화가 필수 과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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