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업 중에서 두산그룹만큼 발 빠르게 변화한 기업도 없다. ‘오비맥주’를 비롯해 코카콜라, 버거킹, KFC 등 소비재 그룹 인식이 강했던 두산그룹은 외환위기 이후 소비재 기업을 모두 정리하고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중화학 그룹으로 변모했다.
동시에 두산그룹만큼 비운의 기업도 없다. 부동산 시장 침체에 따른 건설 계열사 부실이 그룹 전체로 번진데다 탈원전 정책 여파로 그룹 주축인 두산에너빌리티가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자 결국 2020년 채권단 관리 체제에 들어갔다.
그런 면에서 이번 사업구조 개편 실패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그룹이 굴곡진 역사를 뒤로하고 이제야 비로소 원전 사업을 중심으로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다. 두산에너빌리티의 경우 그동안 사실상 지주사 역할을 하며 계열사 챙기기에 바빠 정작 자체 사업에 제대로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이번 개편으로 두산에너빌리티는 2년간 원전 등에 700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었다. 많은 논란과 시장 반발을 남긴 채 개편 작업이 무산된 만큼 당장 재추진에 나설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돌이켜보건대 두산그룹이 시장과의 소통을 충분히 했으면 상황은 어땠을까. 비슷한 시기 합병 계획을 발표한 SK이노베이션과 SK E&S는 주주들의 압도적인 찬성에 힘입어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사업재편에 나섰던 두 그룹의 명암이 엇갈린 것이다. SK그룹의 경우 각사 대표가 직접 나서 기자간담회를 개최하고, 합병 관련 사이트까지 개설하는 등 주주 설득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에 비해 두산그룹은 사업 재편의 당위성에 대한 공감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서 더 큰 논란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지적이 나왔다.
두산은 곡물을 재는 단위인 두(斗)와 산(山)을 합쳐 ‘한 말 한 말 쌓아 큰 산을 이룬다’는 의미를 담아 박승직 창업주의 장남 박두병 초대 회장이 지은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두산그룹은 128년의 국내 최장수 기업으로 이름을 올렸다. 강산이 10번은 넘게 변했을 시간 동안 두산그룹은 숱한 위기를 극복하며 저력을 보여줬다. 이번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두산그룹이 더 큰 ‘태산’으로 우뚝 서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