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사람이랑 안 싸워요.”
새해 첫날인 지난 1월 1일, 서울 광진구의 한 클럽에서 시비가 붙은 20대 남성을 집단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태권도 전공 유단자들이 범행 직후 탄 택시 안에서 기사와 나눈 대화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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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들은 모대학 태권도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다. 지난 1월 1일 건국대 인근 클럽에서 이씨가 피해자 A씨의 여자친구에게 “같이 놀자”며 팔을 잡자 A씨와 시비가 붙어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A씨의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으며, A씨가 “너희 인생 망했다”고 외치자 인근 상가로 A씨를 데리고 가 폭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쓰러져 있던 A씨는 시민의 신고로 병원에 이송됐으나 결국 숨졌다.
◇그날 택시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이날 검찰은 △피고인들이 클럽 내부에서 피해자와 시비가 붙은 모습 △피해자를 클럽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 △대로변에서 폭행하는 모습이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과 △범행 직후 탄 택시 안 블랙박스 영상을 증거로 제출했다.
약 한 시간 정도 재생된 블랙박스 영상을 살펴 보면, 이날 오전 3시20분께 아이스크림을 든 두 남자가 웃으며 택시에 탑승했다. 주범으로 지목된 김씨와 클럽에서 최초 시비가 붙은 이씨였다. 오씨는 없었다. 둘은 택시 안에서 주먹을 휘두르고 맞는 시늉을 하면서 폭행 당시 상황을 묘사하는 듯 보였다.
잠시 후 택시기사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폭행 사건 용의자들을 태우지 않았느냐’는 경찰의 전화였다. “남자 세 명이 한 명을 폭행해서 제 택시를 타고 도망가고 있다고요?” 택시기사가 경찰과 통화하는 내용을 듣자 둘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웃음기는 사라지고 대화는 끊긴 채 각자 휴대전화만 쳐다볼 뿐이었다. 택시 안은 어두웠지만 휴대폰 불빛 때문에 이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나타났다.
통화를 마친 택시기사가 “두 사람 싸움한 것 아니죠”라고 물었다. 김씨와 이씨는 “싸움은 서울에서 많이 나지 않습니까”라며 부인했다.
◇“뇌종양 때문에 쉽게 흥분”…“약 먹는 사람이 술을 그리 먹나”
이날 피고인들은 증인 신문도 받았다.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폭행을 가한 쪽이 누구인지 가리기 위해서다. 택시에 탄 김씨와 이씨, 범행에 가담했던 오씨 등 피고인 3명은 서로 범행 책임을 전가했다.
또한 이들은 “상가에서 쓰러진 피해자가 의식이 없어 보였지만 일이 커질 줄 몰랐다”며 “만약 피해자가 위중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겁나서 도망을 갔을텐데, 몰랐기 때문에 인근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담배를 피운 것”이라고 고의성을 부인했다.
한편 검찰은 CCTV 영상을 토대로 ‘상가 내 폭행은 없었다’는 이씨 측 주장을 반박했다. 검찰은 “최초 시비를 벌인 건 이씨이며, 당시 이씨가 격앙된 상태로 상가까지 피해자를 끌고 간 걸 보면 (상가 안에서도) 아무 행동을 안 한 걸로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상가)밖에서 있었던 일만 보고 상가 안에서도 때렸다고 (생각하지 말아달라)”라며 말을 흐렸다.
상가 안에서 피해자를 폭행한 혐의를 받는 오씨는 뇌종양 진단서를 제출하면서 “피해자가 욕설을 하자 화가 나서 폭행을 한 것은 뇌종양 탓에 쉽게 흥분했기 때문”이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 피의자들이 소주 10병을 나눠 마시고 술김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진술이 나왔고, 재판부는 “뇌종양으로 약도 먹는다는 사람이 술을 이렇게 먹느냐”며 호통쳤다.
재판부는 또 쓰러진 피해자의 얼굴을 발로 가격한 혐의를 받는 김씨에게 “태권도로 대학까지 가면서 머리를 조준한 발차기를 맞으면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육받지 않았나”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다음 공판은 5월 26일 예정됐다. 이날 공판에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피해자 부검 결과를 확인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