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지난 21일, ‘전기통신사업법 83조 3항’이 위헌이라는 4건의 헌법소원 청구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6년 전, 시민사회단체들이 통신자료를 무단 수집 당한 500명의 시민을 대리해 청구한 사건에 드디어 판단이 내려진 것이죠.
그런데 이번 결정은 한 걸음 나간 것은 분명하나 반쪽자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산업 현장에서의 혼란은 여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헌재는 ①통신사가 영장 없이 수사기관에 통신 가입자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아이디(ID), 가입일 등을 내 줄 수 있는 조항은 합헌이라고 판단했고 ②다만, 통신자료 제출에 대한 사후통지절차를 마련하지 않은 부분이 헌법에 위반된다(헌법불합치)고 판단했습니다.
헌법불합치는 법 조항은 위헌인데 즉각 무효로 결정하면 혼란이 커지니 입법부(국회)가 대체 입법을 할 수 있도록 시한을 정해 존속시키는 결정입니다. 이번 경우도 내년 12월 31일까지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해야 하죠.
이번 판결의 공과를 말하려면 ▲통신자료가 뭔지 ▲그동안 산업 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사후적으로 개인에게 통지해 주면 끝인지 등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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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 일괄조회로 ‘통신자료’ 논란 촉발
지난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수사 대상이 아닌 언론인과 사회단체 활동가 등의 통신자료를 광범위하게 조회해 민간인 사찰 논란이 일었죠.
통신자료는 통신 내용은 아닙니다. 즉, 가입자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통화했는지에 대한 정보(통신사실확인자료)나 감청(통신제한조치)과는 다릅니다. 통신 내용을 보려면 영장이 있어야 하죠.
통신자료는 ‘이용자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와 전화번호, 아이디, 가입 및 해지일 등 통신이용자의 인적사항’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현행 법(전기통신사업법 83조 3항)에선 전기통신사업자(통신사 또는 포털 등)는 수사관서의 장 등이 형의 집행 또는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위해를 방지하기 위한 정보 수집을 위해 통신자료에 대해 열람이나 제출을 요청하면 영장 없이도 ‘따를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통신사는 주고, 인터넷 기업은 안 주고
문제는 통신사들은 위 조문을 근거로 수사기관 등에서 협조 공문이 오면 통신자료를 내주고 있고, 네이버나 카카오는 내주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주어가 전기통신사업자인데, 통신사(기간통신사)들과 인터넷기업(부가통신사)이 모두 포함되지만 그렇습니다.
법 조항이 애매한 탓도 있지만, 2012년 10월 법원의 손해배상 판결이 인터넷 기업의 관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카페 운영자인 A모씨는 2012년 네이버가 개인정보에 대한 보호의무를 망각하고 기계적으로 통신자료를 내줬다고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A씨 손을 들어준 것이죠. 네이버는 투명성 보고서에서 “네이버는 지난 2012. 10월 통신자료 제공에 관한 사업자의 실체적 심사의무 존재여부 확인 및 영장주의 위배 우려 등과 관련한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여 통신자료의 제공을 중단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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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자에게 나중에 통지해주면 끝일까?
지난번 공수처 통신자료 조회 사찰 논란이 있을 때, 저도 통신사 고객센터에 신청해서 통신자료 조회여부를 확인해 봤습니다. 온라인으로 신청하고 답신을 받는데 2,3일 정도 걸렸지만, 법에 사후통지 조항이 없다 보니 개인이 가끔 씩 직접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더군요. (저는 수사기관의 조회사실이 없었습니다.)
헌재 역시 이번 판단에서 “통신자료 제공 요청이 있는 경우 정보 주체인 이용자에게 요청이 있었다는 점이 사전에 고지되지 않으며 전기통신사업자(이동통신사)가 수사기관 등에 통신자료를 제출한 경우도 이런 사실이 이용자에게 별도로 통지되지 않는다”며 “정보 주체의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판시했습니다. 사후 통지절차를 두고 있지 않은 점이 적법절차 원칙을 위배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통신사들이 고객들에게 ‘당신의 개인정보(통신자료)를 수사기관 등이 요청해 조회 사실이 있다“고 통보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통신사가 자발적으로 제공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만족해야 할까요? 수사기관이 영장없이 협조공문만으로 통신자료를 취득하는 일은 강제력이 없어 공권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는 게 법원 판단인데, 즉 통신사들이 자발적으로 고객 정보를 제공했다는 말인데, 정말 그렇게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혹시 정부의 각종 규제에 놓인 통신사들은 규제가 덜한 인터넷기업들보다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따를 수 있다’라는 조항을 ‘따라야한다’로 해석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협조공문만으로 통신자료 조회하는 관행에 대해 사회적 논의해야
‘헌재 판단대로라면 전기통신을 하는 순간, 국민은 익명통신의 자유를 잃게 된다’는 (사)오픈넷의 주장도 공감이 가는 얘깁니다.
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수사대상이 된 사람이 포함된 카카오톡 그룹채팅 방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내 전화번호와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이 수사기관에 그대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하려면 반드시 실명을 대고 말해야 한다는 의미로 확대될 수도 있죠.
네이버, 카카오 등은 영장주의에 입각해 통신사실확인자료에 대한 명령(법원 영장발부 이후)이 있을 때만 신상정보를 제공하는 관행을 실행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수사가 현저히 어려워졌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오픈넷은 “이번 판결로 네이버, 카카오까지 영장 없는 통신자료 제공에 협조할 위험도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국회가 ‘전기통신사업법 83조 3항’을 개정할 때, 헌재 판단 범위에 구속되지 말고 협조공문만으로 통신자료를 얻을 수 있는 현재의 수사 관행에 대해 사회적 공론의 장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