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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4년 ‘북핵 제네바 합의’의 주역 중 한 명인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북핵 대사는 16일 북한의 6차 핵실험 강행과 잇따른 미사일 발사로 촉발된 한반도 긴장 상황과 관련, “오늘 북핵 상황에 대해 행복한 얘기는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이렇게 진단했다.
한반도 전문가인 갈루치 전 대사는 지난 1993년 제1차 북핵 위기 당시 미국 측 수석대표를 맡아 핵시설 건설 동결 대가로 북한의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는 내용의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냈다.
갈루치 전 대사는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백주년기념관 콘서트홀에서 열린 ‘북핵 문제 해결과 동아시아 평화 공존’을 주제로 한 특강에서 북한과 조건 없는 대화에 나설 것을 국제사회에 주문했다.
갈루치 전 대사는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 협상하는 척 하며 필요한 혜택은 다 취하고 있다’고 생각해 협상을 반대하고 있다”면서 “1994년 북미 협상을 돌아보면 협상은 필요하며 우방과 미국의 안보를 증진시킨다”고 강조했다.
당시 미국은 핵개발 동결 대가로 경수로 지원과 대체에너지로 연간 중유 50t 제공 등을 약속했다. 북한은 이에 따라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와 모든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허용, 핵 활동의 전면 동결 및 기존 핵시설의 궁극적인 해체를 약속했다. 그러나 2002년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프로그램 운영 문제가 불거지며 합의는 파기됐고 2003년 8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6차례에 걸쳐 열린 6자 회담도 북한의 핵포기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갈루치 전 대사는 “비록 그 후 북한이 파키스탄으로부터 원심 분리 기술을 갖고 오는 등 속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미국 역시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비난하는 등 관계 정상화에 나서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갈루치 전 대사는 이어 국제사회가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여러 전제조건을 다는 것을 두고 “협상은 신뢰감을 계속 높여가며 성취하는 것이란 점을 기억해야 한다”며 “우선은 조건 없는 상황에서 대화를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북 제재 결의안 이행에 중국이 적극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에 대해 “제재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중국이 북핵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라며 제재만으로는 북핵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1994년 북미 협상 당시 북한 내부 붕괴를 예상하고 협상을 진행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당시 미국 측에 북한이 붕괴할 거라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며 “(붕괴를 예상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밝혔다.
특강에 앞서 이날 토론을 맡은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갈루치 전 대사를 두고 “탁월한 외교관으로 국무부 내에서도 탁월한 협상가라고 정평이 나 있다”며 “가장 큰 장점은 역지사지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한편 갈루치 전 대사는 미 국무부에서 20여년 간 근무하며 정책기획관과 동아시아 담당 국장, 정치·군사 담당 부차관보 등을 지냈다. 퇴임 후 조지타운대 외교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현재 같은 대학 외교통상학 특임교수를 맡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전직 고위 관리들과 함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가까운 장래에 북한과 대화를 시작하기를 강력히 촉구한다”는 내용의 공동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특강에 앞서 갈루치 전 대사는 이날 오전 청와대를 예방하고 문재인 대통령과 비공개 면담한 자리에서 현재 한반도 상황에 대한 견해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