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의 적대적 M&A 추진에 日자본시장 '시끌'

김형욱 기자I 2017.04.13 15:57:03

한 중소기업 CEO, 후지쯔 60년 협력사 인수 나서
"보수적 일본 자본시장, 주주이익 중심 바뀌어야"
협력사 경영권 방어 나선 거대기업 후지쯔 '난감'

일본 자본시장을 주주 이익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며 10년 만에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추진 중인 사사키 베지 프리지어 마크로스 회장 /바쏘 베게 홈페이지


[이데일리 김형욱 기자] 일본에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기업 경영권을 뺏기 위한 적대적 인수합병(M&A)전이 펼쳐지고 있다. 주주 이익보단 협력사와의 안정적 관계를 중시해 온 일본 기업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며 파문이 일고 있다.

기계 제조·PC 유통사업을 하는 소기업 ‘프리지어 마크로스(Freesia Macross)’의 사사키 베지(61) 회장은 올 2월 초 중견 전자회사 ‘솔레키아(Solekia)’를 적대적 인수합병(M&A)한다고 선언했다. 사사키 회장은 이와 함께 솔레키아 주식을 44% 프리미엄을 붙인 주당 2800엔에 매수키로 했다. 솔레키아는 연매출 200억엔(약 2000억원)대 일본 전자 부품 생산·판매 회사다. 또 이를 인수하려는 프리지어 마크로스는 자본금 20억엔(약 200억원), 직원 38명의 소기업이다.

작은 회사가 큰 회사의 경영권에 대해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것도 화제지만 더 큰 관심은 솔레키아의 배경이다. 솔레키아는 60년 넘게 일본 거대 기업이자 아시아 최대 정보통신기술(ICT) 회사인 후지쯔(富士通)와 거래해 온 전통의 협력사다. 일본식 경영 문화에서 솔레키아는 사실상 후지쯔의 자회사처럼 취급돼 왔다. 솔레키아의 이사회 멤버 중 넷은 전 후지쯔 임원이기도 하다. 솔레키아의 경영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 솔레키아는 물론 후지쯔의 전통적인 관계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게 일본의 통념이다.

후지쯔도 불의의 기습에 대응하고 나섰다. 솔레키아 주식을 사들이며 경영권 방어에 나섰다. 솔레키아가 첫 주식 매수에 나선 지 한 달여 후인 3월16일 솔레키아 주식을 80% 프리미엄이 붙은 주당 3500엔에 샀다. 또 이 같은 과정이 두 달 동안 세 차례 반복됐다. 솔레키아의 주가는 그 여파로 2개월 새 2.5배 이상 급등했다. 2월2일 주당 1942엔이었으나 후지쯔의 이달 5일 세 번째 방어 매수 땐 157%의 프리미엄을 붙인 주당 5000엔에 매수했다. 13일 다시 급등하며 전날보다 11.35% 오른 주당 5590엔에 마감했다.

솔레키아 적대적 인수합병(M&A)를 추진 중인 베지 사사키 프리지어 마크로스 회장과 이를 막으려는 후지쯔의 솔레키아 주식 매수 현황. /FT
솔레키아 최근 3개월 주가 추이. /구글


그러나 주주, 특히 외국인 투자자를 중심으로 후지쯔가 솔레키아 경영권을 왜 방어해야 하냐며 그 필요성에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 아베 신조(安部晋三) 일본 총리도 4년 전부터 자국 기업 지배구조를 주주 이익 중심으로 재편하겠다고 한 마당에 후지쯔가 주주에 아무런 이득도 없는 작은 회사의 경영권에 돈을 쓰는 걸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후지쯔가 보유한 솔레키아 지분은 2.7%에 불과하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후지쯔가 작은 기업에 발목이 잡혀 자신의 투자자에 현 상황을 설명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고 평가했다.

이번 적대적 M&A를 주도한 사사키 회장은 보수적인 일본 경영계에선 파격적인 행보로 알려진 인물이다. 1980년대 미국 화장품·잡화 회사인 아봉 프로덕트(Avon Products)를 4억5000만달러(약 5000억원)에 인수하려다 실패하며 일 경영계에 이름을 알린 그는 이후 1990년대 파산신청한 소기업 프리지어 마크로스를 인수해 정상화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최근엔 옷 브랜드 ‘바쏘 베게(Wasso Vege’s)‘를 선보이고 밴쿠버 패션 위크에 출품하기도 했다.

사사키 회장은 주주의 이익보다 전통을 중시하는 일본 자본시장의 전통을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지난 11일(현지시간) FT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이긴다면 1868년 메이지 유신(일본 근대화운동) 한번도 바뀌지 않던 일본 자본시장의 체질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가 실패하더라도 이 시도가 대기업의 오랜 ‘악습’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솔레키아 주주로서도 손해는 아닐 듯하다. 당장 주가가 2.5배 이상 뛰었다. 솔레키아가 지금껏 후지쯔와의 사업에 의존한 나머지 주주들에 소홀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솔레키아는 안 그래도 저평가된 일본 기업 중에서도 더 저평가됐었다. 적대적 M&A 시도 직전 이 회사의 시가총액은 16억8000만엔(약 175억원)으로 순자산의 3분의 1, 현금성 자산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일본 토픽스 구성 종목 기업 중 시가총액이 순자산보다 적은 기업은 45%에 불과하다. 미국 S&P1500이나 영국 FTSE ALL-Share에는 각각 5.9%, 15.2%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 인수전 덕에 두 달새 시가총액이 세 배 가까운 56억8500만엔(약 589억원)까지 늘었다.

사사키 회장은 “솔레키아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은 15년째 0.5% 수준”이라며 “이대로 놔두면 회사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며 이번 M&A 추진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솔레키아측도 반박에 나섰다. 이곳 관계자는 “단기적 이익만 추구하다보면 고객사와의 오랜 관계가 무너질 수 있다”고 반박했다. 또 사사키 회장에 대해 “회사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며 주주에게도 적대적 M&A에 반대해줄 것으로 당부했다.

/AFP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