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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7시 서울 강남구 신논현역 6번 출구 앞. 오전부터 내리다 말다 한 비가 다시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 2년 전 일어난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으로 숨진 A씨(당시 23)를 기리는 추모집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집회를 주최한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340여개 여성ㆍ노동ㆍ시민 단체 모임인 ‘미투운동(metoo·나도 당했다)과 함께하는 시민행동’과 주최측 추산 2000명, 경찰 추산 1000명의 여성 등이 함께 했다.
집회에 참가한 이들은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우리가 서로의 용기다”,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당하지 않고 죽지않을 도시를 원한다”등의 피켓을 들고 비가 내리는 강남 한복판에서도 오후 8시까지 1시간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날 집회는 먼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을 추모하는 묵념으로 시작해 활동가들의 자유발언과 자유발언 사이 ‘홍대 마녀’로 불리는 싱어송라이터 오지은의 공연으로 이어졌다.
한국여성단체연합 활동가 보람은 “우리사회에서 성폭력, 성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여성들의 죽음은 계속될 거다. 여성들은 위태로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며 “이제는 끝내야 한다. 성차별과 성폭력이 난무하는 우리사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페미니스트 모임 ‘불꽃페미액션’ 이가연 활동가는 성폭력 가해자들의 태도 변화도 촉구했다. 이가연 활동가는 “어제 미투 운동으로 고발된 성폭력 가해자 오모씨가 술을 많이 마셔 병원신세를 졌다는 뉴스를 들었다”며 “성폭력 가해자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수사에 성실하게 임하고 성폭력과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고 기사도 찾아보고 어떻게 하면 자신과 사회가 바뀔 수 있는지 고민하십시오”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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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으로 혼자 집회에 나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정모씨(27·여)는 “2년 새 사회는 더 안 좋아진 거 같다. 더 극단적으로 됐다”며 “극단적이라는 건 운동을 하고 말을 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서 더 반감을 갖는 시민들이 더 많아졌다는 얘기다. 외려 남혐(남성혐오)을 거론하면서 극단적으로 몰아세우는 거 같다”고 말했다.
정씨는 “2년 동안은 가만히 보기만 했는데 요즘들어 더 화가 나는 거 같다”며 “2년 전에는 그냥 슬프다고 했지만 요새는 이건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강조했다.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공부’를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이모(19·여)씨 역시 “2년새 사회는 개선은커녕 여성을 억압하려는 움직임이 더 커졌다”며 “2년전 강남역 살인사건도 그렇고 많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 벌어졌고 그에 분노하고 목소리를 냈지만 대부분 그런 요구들이 묵살되고 있다”고 역설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성폭력 등 강력범죄는 총 3만270건으로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2016년 2만7431건보다 외려 10% 증가했다.
이날 집회는 8시에 끝났다. 참가자들은 이후 집회 장소에서 강남역 10번출구로 이동해 강남역 5번출구에서 유턴해 다시 신논현 6번출구로 돌아오는 행진에 나섰다. 행진 도중 집회 참가자들은 “우리는 여기 있다, 너를 위해 여기 있다”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원래 사건 발생장소 주위의 골목을 행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집회 시작 전 모 온라인 커뮤니티에 집회에 위해를 가하겠다는 글이 올라와 안전을 위해 경찰과 논의해 행진 코스를 변경했다. 주최측은 “여성들은 이런 집회에서조차 안전에 위협을 받고 있다”며 “경찰은 온라인상의 위협에 대해 신속하게 수사해달라”고 촉구했다.
한편, 강남역 살인사건은 2016년 5월 17일 새벽 강남역 유흥가 유명 노래방 화장실에서 김모(34)씨가 A씨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다. 김씨는 범행 동기와 관련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밝히면서 “여자라서 죽었다”는 식의 분노가 들끓었다. 경찰과 검찰, 법원은 김씨의 정신장애(조현병) 등을 근거로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라고 사건을 규정했다. 하지만 여성계 등은 일상 속의 구조적인 성차별과 여성에 대한 비하 등 ‘여성혐오’가 원인이라는 시각을 보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