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아시아 데이터 연대, 데이터 패권 전쟁 넘어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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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기자I 2025.09.09 16:30:41
[남규택 제너스에어 부회장(전 KT희망나눔재단 이사장)] 중국이 7월 15일부터 시행한 ‘국가 인터넷 신분증’ 제도를 보며, 우리는 데이터 게임의 판도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개인정보 보호를 내걸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모든 디지털 발자국을 추적하려는 야심찬 전략이 숨어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데, 이는 온라인 감시 체계 확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미 600만 명이 참여한 시범 운영을 통해 드러난 것은 단순한 실명제가 아니다. AI 시대의 ‘스마트 데이터 패러다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빅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양적 확장에만 집중했다면, 이제는 맥락과 구조를 갖춘 고품질 데이터가 진짜 경쟁력이 되고 있다. GPT-5나 클로드(Claude)같은 최신 AI 모델들이 단순한 텍스트 더미가 아닌, 큐레이션된 데이터로 학습되는 것처럼 말이다.

남규택 제너스에어 부회장(전 KT희망나눔재단 이사장)
이 시점에서 우리나라를 둘러보면 안타까운 상황이 보인다. 우리는 이미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수준의 정교한 디지털 실명 문화를 갖추고 있다. 주민등록번호 기반의 전자정부 시스템, 국민건강보험 데이터베이스, 통합적 금융망은 여러 해 전부터 운영됐으며, K-방역 같은 성공 사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방대한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여전히 다소 미흡한 상태다. 데이터의 금광 위에 서 있지만, 이를 캐낼 도구와 의지는 부족한 상황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비단 우리만의 고민이 아니다. 일본, 싱가포르, 대만 등 아시아 중견국들도 비슷한 딜레마를 겪고 있다. 각자 뛰어난 디지털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지만, 미중 패권 경쟁 구도 속에서 독자적 활용 전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개별 국가 차원의 데이터만으로는 글로벌 AI 시장에서 의미 있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바로 여기서 개별 국가의 한계를 뛰어넘는 ‘아시아 데이터 연대’라는 전략적 기회가 등장한다.

현재 디지털 세계는 두 극단으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의 국가 주도 통제 모델이고, 다른 하나는 구글과 메타로 대표되는 미국 빅테크의 데이터 독점 모델이다. 하지만 아시아에는 제3의 길이 있다. 실제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은 이러한 제3의 길을 제도화한 선례다.

CPTPP의 디지털 무역 챕터는 데이터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면서도 각국의 프라이버시 보호 정책을 존중하는 균형점을 제시했다. 특히 일본, 싱가포르, 호주, 뉴질랜드 등 CPTPP 회원국들이 보여준 협력 방식은 국가 주권과 시장 효율성을 동시에 존중하는 ‘신뢰 기반 디지털 거버넌스’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러한 선례는 아시아 데이터 연대가 단순한 이상이 아닌 현실적 가능성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를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하여 아시아 전체의 데이터 연대를 구축하려면 보다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먼저 공통의 이익이 명확한 분야부터 협력을 시작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우리나라의 접촉자 추적 시스템과 싱가포르의 TraceTogether는 국경을 넘는 데이터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럼 기후변화 대응 데이터 협력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은 어떨까?

다음으로는 각국의 서로 다른 법 체계를 억지로 통일하려 하지 말고, 공통의 기술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합학습(각 기관이 데이터를 직접 공유하지 않고도 공동으로 AI 모델을 학습시키는 기술)을 활용하면,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면서도 협력할 수 있다. 구글과 애플의 API 협력(Exposure Notification API)은 프라이버시 중심 협력의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이 연대의 궁극적 목표는 아시아 고유의 AI 생태계 구축이다. 챗GPT나 클로드 같은 서구 AI 모델들은 분명 뛰어나지만, 한국어의 높임법이나 일본어의 경어 체계 같은 아시아의 복잡한 언어문화적 맥락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런 수천 년의 문화적 DNA를 담은 언어 데이터를 아시아 각국이 공유하면서 다국어-다문화 AI를 공동 개발한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는 이 비전의 핵심이다. 미중 간 ‘사이 국가’로서, 우리는 양쪽의 압박을 받는 동시에 독특한 기회를 잡고 있다. 미중 디지털 패권 경쟁이 심화될수록 제3의 대안을 찾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가 초고속 인터넷(FTTH)과 반도체 기술, 민주적 가치로 이미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아시아 중견국들과 신뢰 기반의 디지털 협력 질서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질서를 설계하는 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

결국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니다. 디지털 미래를 어떤 가치로 설계할 것인가의 전략 경쟁이다. 중국은 효율성과 통제를, 미국은 혁신과 시장 주도를 내세운다. 하지만 아시아에는 이 둘을 넘어서는 신뢰와 협력, 다양성과 조화라는 고유한 가치가 있다.

우리나라가 이런 가치를 바탕으로 아시아 데이터 연대를 이끌어낸다면, 우리는 21세기 디지털 질서의 공동 설계자가 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첫발을 내디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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