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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다중대표소송은 정말 위험한 룰인가

박수익 기자I 2017.02.14 17:21:11
[이데일리 박수익 기자] 1997년 3월 7일 제일은행 주주총회장에 장하성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과 박원순(현 서울시장) 사무처장 등이 모습을 나타냈다. 당시 제일은행은 한보그룹에 거액 대출을 제공한 이후 회수 불가능한 부실채권을 무더기로 떠안은 상황이었다. 참여연대 측은 이러한 판단을 한 제일은행에 책임을 묻기 위해 주총발언권을 요청했지만, ‘총회꾼’까지 동원한 제일은행은 이들에게 발언기회를 주지 않고 주총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소액주주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여 주주대표소송에 필요한 주식을 모았고, 4명의 제일은행 이사진을 상대로 400억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이듬해인 1998년 서울지법 민사17부는 참여연대 등 소액주주 61명이 참여한 이 소송에 원고(주주) 승소판결을 내렸고, 이 판결로 피고(제일은행 이사진 4명)는 400억원을 자신들이 제직한 제일은행에 배상해야했다.(이 소송은 이후 제일은행측의 지분 전량감자 조치로 소액주주들이 원고자격을 상실하면서 회사(제일은행)가 원고로 대신참여, 손해배상액이 10억원으로 낮춰져 2002년 대법원 최종판결을 받았다.)

1962년 상법 제정으로 도입된 주주대표소송은 30년간의 ‘사문화’ 기간을 거쳐 이렇게 국내에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이제 다시 시간이 흘러 국회 안팎에선 다중대표소송 도입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주주대표소송은 제일은행 사태처럼 회사에 손해를 끼친 이사진의 행위에 대해 회사가 책임을 묻지 않으면 주주가 회사를 대리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제도다. 주주와 회사의 소송이 아닌 주주와 이사진의 소송이다. 회사가 먼저 이사진에 소송하면 주주들의 소송 자격(원고적격)은 소멸된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다중대표소송(상법 개정안)도 주주대표소송과 기본원리는 똑같다. 차이점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주주자격의 범위를 모회사로 넓힌 것이다.

다중대표소송은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제도다. 대표적 오해는 ‘소송 남발’ 우려다. 주주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만 생각해 소송을 남발하면 결국 회사가 피해를 입는 것 아니냐는 인식이다.

그런데 현행 주주대표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원고(주주)는 승소 대가인 손해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않는다. 배상금은 주주가 아닌 회사로 귀속된다. 배상금을 내는 쪽도 회사가 아니다. 불법행위를 한 이사진 개인돈으로 낸다. 다중대표소송의 성격은 더욱 뚜렷하다.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진에게 제기한 소송에서 이기면 손해배상금은 자신들이 주식을 가진 모회사도 아니고 자회사로 귀속된다. 승소시 주주에겐 당장의 금전적 이익이 없고 회사에는 즉각 금전적 이익이 있다. 그러나 원고가 패소하면 소송비용은 원고 몫이다. 패소시 주주는 즉각 금전적 손실이 있고 회사는 금전적 손실이 없다.

패소 부담을 떠안을 수 있고 승소해도 원고에게 직접적으로 돌아오는 금전적 이익이 없는 소송이다. 그래서 공익소송이라고 부른다. 주주에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감수해야하는 부담이 있기에 무턱대고 남발하면 주주가 손해를 볼 수 있는 소송이다. 최초의 주주대표소송 사례인 제일은행(1997년)부터 2012년 말까지 법원에 제기돼 판결이 내려진 주주대표소송은 총 58건이다. 한해 평균 3.6건이고 가장 많은 소송이 제기된 2014년에 7건이 최대치다. 이 정도면 ‘남발’이 아니라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게 상식적 판단이다.

다중대표소송의 해외 입법사례가 일본밖에 없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다. 팩트이긴 하지만 또 다른 팩트가 숨어있다는 점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다. 다중대표소송을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지만 수많은 판례가 있는 미국,유일하게 다중대표소송을 법적으로 명분화한 일본에는 ‘단독주주권’을 인정한다. 단 1주만 가진 주주라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국내에선 지분 1%를 모아야 소송할 수 있다. 상장사는 0.01%로도 가능하지만 6개월간 주식을 의무보유하고 있어야하는 특례가 있지만 시가총액이 큰 대형 상장사의 경우 주주모집부터 쉽지는 않다. 현재 국회에 제출된 상법개정안은 이러한 소송 제기 자격을 완화하는 방안은 빠져있다. 이를 알고도 무턱대고 소송남발 우려를 제기한다면 `오해`가 아니라 `왜곡`이다.

자금력 뛰어난 해외자본이 적극 소송을 제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 지분 0.62%를 보유중이라고 밝힌 엘리엇은 (현재도 지분을 가지고 있다면) 다중대표소송이 아니라 현행 상법으로도 얼마든지 삼성전자에 주주대표소송을 걸 수 있다. 다중대표소송은 지주회사처럼 출자구도가 수직화되고 내부지분율이 높은 곳에 주로 해당하는 내용이다. 지주회사는 자회사 관리가 본업이다. 자회사 관리를 잘 해야 지주회사 가치도 올라간다. 자회사 부실을 방치하거나 은폐하면 고스란히 지주회사와 그 주주 피해로 돌아온다. 이를 위한 견제수단을 하나 더 보강하자는 게 다중대표소송이다. 반대논리나 부작용, 법리적 논쟁 하나 없이 완벽한 법은 없다. 그러나 순기능은 철저히 외면하고 부작용만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왜곡은 하지 말아야 한다.

복잡한 법 논리를 떠나 이해관계를 떠나서 한국 기업지배구조의 현실을 보여주는 아주 쉬운 예가 있다. 다중대표소송과 함께 입법이 가시화되는 전자투표제 의무화다. 2009년 상법 개정으로 이미 국내에 전자투표제를 도입했지만 회사 선택에 맡기다보니 도입하지 않는 곳이 더 많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의무화하자는 것이다. 전자투표제를 도입하지 않는 기업명단에는 첨단IT기술로 먹고사는 삼성전자(005930)LG전자(066570) 같은 곳도 있다. 이전과 달리 발달한 IT기술을 활용해 소액주주들에게 주총 참여 방법을 좀더 다양하게 열어주자는게 전자투표제도인데 정작 IT기업부터 응답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 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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