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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보당국의 조사 결과를 불신하는 듯한 태도에 공화당과 민주당을 불문하고 “국가 지도자로서 부적절했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민주당과 언론들은 “수치”, “모욕” 등의 표현을 써가며 맹공에 나섰으며, 공화당도 “선을 넘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에게 개인적인 책을 잡힌 게 아니냐”면서 청문회 추진을 예고했다.
◇트럼프 “러 스캔들 수사는 재앙”…美기자들 앞에서 푸틴 두둔
이날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마치고 가진 공동기자회견은 러시아 스캔들 청문회를 방불케 했다. 미국 기자들의 질문은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에 집중됐다. 푸틴 대통령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대선 개입 사실을 부인했다. 심지어 미국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 정보기관에 대단한 신뢰를 갖고 있지만, 오늘 푸틴 대통령의 부인은 매우 강력했다”면서 푸틴 대통령을 두둔하고 나섰다.
나아가 “러시아의 선거 개입에 대한 미국의 수사는 우리나라(미국)에 재앙”이라며 화살을 미국 연방수사국(FBI)와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팀에 돌렸다. 푸틴 대통령을 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나 행동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정상회의에서 유럽 정상들을 상대로 보였던 ‘무소불위·독불장군식’ 태도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에 앞서 “아무리 좋은 성과를 내더라도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며 기대치를 낮췄지만, 예상을 크게 밑도는 저자세 외교에 비난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못내 진화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더 밝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선 과거에만 집중할 수 없다”고 강조했으나, 연이은 트윗에서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와 세계에도 유익한 생산적인 대화였다”고 자평해 정치권과 언론의 화만 복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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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미·러 정상회담에 대해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사법기관과 국방·정보당국에 맞서는 푸틴 대통령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경솔하고 위험하며 허약하다”고 비판하면서 청문회를 열어 미·러 정상회담에 참여한 백악관 안보팀의 증언을 청취할 것을 공화당에 촉구했다. 그러면서 “이 위험한 행동에 대해 가능한 유일한 설명은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나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많은 미국인은 궁금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당 낸시 펠로시 하원 원내대표도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러시아가 그에 대해 개인적으로, 재정적으로, 정치적으로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즉, 트럼프 대통령의 2013년 모스크바 방문 당시 성관계 영상을 러시아 정보당국이 갖고 있다는 이른바 ‘트럼프 X파일’ 의혹이 양 정상의 회담에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게 민주당의 의심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을 옹호한 것이 이와 연관돼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이와 관련,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회견에서 만약 러시아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공개했을 것이라고 했다. 푸틴 대통령도 관련 질문에 “그 루머는 들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당시 모스크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 문제는 다시는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이외에도 마크 워너(버지니아) 상원 정보위원회 부위원장이 트위터를 통해 “미국 대통령이 자국 정보기관 관리들 대신 푸틴 대통령 편을 든데다, 민주주의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에 대해 자국 탓을 하다니 이는 완전한 수치”라고 꼬집었다. 엘리자베스 워런(메사추세츠) 상원의원도 “트럼프 대통령이 또 국제무대에서 미국을 망신시켰다”면서 “우리 (정보) 기관을 폄하하는가 하면 우리의 동맹을 약화시키고 독재자를 옹호했다”고 비판했다.
◇공화당도 “러시아는 敵”, “수치스럽다” 혹평 가세
트럼프를 지지하는 공화당도 혹평 대열에 가세했다. 공화당 서열 1위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이날 성명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리 동맹국이 아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며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윤리적 동등함이 없다. 러시아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와 이상에 적대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러시아가 우리 선거에 개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들은 그들은 여전히 미국과 전세계 민주주의를 해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미치 매코널(켄터키) 상원 원내대표도 “또다시 말하지만 러시아는 우리의 친구가 아니다. 나는 우리 정보기관의 평가를 믿는다”고 강조했다. 중진인 존 매케인 상원 의원은 성명을 내고 “미국 대통령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실적”이라며 맹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조언자인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마저 “그의 대통령직 수행에서 가장 심각한 실수”라며 “즉시 수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는 미국 정보당국도 집중 포화를 쏟아냈다. 존 브레넌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트위터에 “트럼프 대통령의 헬싱키 기자회견은 ‘중범죄와 비행’의 문턱을 넘어섰다”며 “반역적인 것과 다름없다. 완전히 푸틴의 호주머니 속에 있었다”고 적었다. 댄 코츠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성명을 내고 “러시아가 2016년 대선에 개입했다는 우리의 평가는 분명하다. 러시아는 지속해서 우리의 민주주의에 침투하려 하고 있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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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언론들은 혹평으로 일관했다. 평소 친(親)트럼프 성향을 보였던 매체들까지 평소와 달리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폭스비즈니스 진행자인 네일 카부토는 “유감스럽지만 제 느낌을 말씀드리자면, 그냥 잘못된 것”이라며 “미국 대통령이 우리의 가장 큰 적, 상대국, 경쟁자에게 최소한의 가벼운 비판조차 하지 못했다”고 했다. 폭스뉴스 패널 가이 벤슨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최악의 하루”라고 평가했다. 보수성향의 인터넷매체 드러지리포트는 “푸틴 대통령이 헬싱키에서 군림했다”는 제목으로 메인 홈페이지를 장식했다.
평소 트럼프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있는 매체들은 기사와 사설, 칼럼 등을 통해 공격을 이어나갔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는 대통령이 해외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관한 모든 개념을 무너뜨렸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을 만난 후 한 가지가 분명해졌는데, 그것은 러시아 스캔들과 관련해 푸틴 대통령의 말만 믿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이 신문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취임 선서를 오늘 버렸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도 사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적국 범죄 지도자와 공개적으로 공모했다”고 꼬집었다. 또 루스 마커스 부편집장은 칼럼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그만둬라. 당신들의 명예와 영혼, 평판을 지켜라”라고 촉구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의 외교정책은 개인적이며 충동과 본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자신을 얼마나 칭송하는지에 따라 다른 정상에 대한 대우를 달리한다. (신문)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위해 정책과 기관을 비판하고 결과에 상관 없이 승리했다고 주장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싣고, “민주·공화 양당에서 강한 역풍을 불러올 것”이라고 전했다.
이외에도 CNN 앵커 앤더슨 쿠퍼는 “여러분은 지금까지 미국 대통령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행동 가운데 하나를 지켜봤다”고 말했다. 같은 방송사 앵커인 존 킹도 이번 회담을 트럼프 대통령의 “항복 회담”이라고 혹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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