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난해 11월 1만7330원 어치의 커피와 율무차, 라면, 소시지 등 식료품을 훔친 데 이어 올해 4월에는 시금치와 단무지, 반찬통, 페인트 솔이 담긴 등산가방을 훔쳤습니다. 식료품은 다 합쳐봐야 2만 원 안팎이었지만 등산가방이 40만 원 상당으로 절취액을 다소 높였습니다. 그 대가는 징역 8월, 실형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생계형 범죄라고 해도 처벌은 피할 수 없습니다. 대다수 국민들의 의견도 동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최근 이 같은 ‘현대판 장발장’들에 대한 법원의 엄격한 판단에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은 이어집니다. 국민들의 ‘법감정’은 아마도 이들에게 ‘처벌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들보다 중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더한 처벌을 내려달라는 데 있는듯 합니다.
이에 더해 법원 외적으로는 ‘현대판 장발장’들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국가가 ‘복지 사각지대’ 해소에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함께 나옵니다.
◇배고픔에 라면 움켜쥔 노인에 실형…‘상습’ 때문에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26단독 류일건 판사는 최근 상습절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모(78)씨에게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김씨는 지난해 11월 서울 중구에 있는 한 대형상점 식품 코너에 진열된 커피·율무차·라면·소시지 등 식료품 1만7330 원 상당을 훔쳐 달아났고, 뒤이어 지난 4월엔 서울 2호선 영등포구청역 내 상점 진열대에 다른 손님이 잠시 올려 둔 40만 원 상당의 등산가방을 들고 달아난 혐의를 받았습니다. 등산가방 안에 든 내용물을 노린 것인데 거기엔 시금치와 단무지 각 1팩, 반찬통과 페인트 솔 등이 들어 있었죠. 생계형 범죄였습니다.
김 씨는 경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선처를 호소했지만 ‘상습’을 이유로 실형을 면치 못했습니다. 실제로 김 씨는 지난 2005년 징역 1년 6월, 2008년 징역 3년, 2015년 벌금 150만원, 2019년 벌금 100만원, 올해에도 벌금 100만원 등 절도로만 총 19회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었습니다. 류 판사 역시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상습성’을 인정해 실형을 선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죄에 따른 처벌은 불가피…그럼 국민은 왜 분노하나
이번 사건은 여러 ‘현대판 장발장’ 사건들이 갖는 두 가지 사회적 시사점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우선 ‘죄에 걸맞은 합당한 처벌을 하고 있는가’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을 지낸 김한규 변호사는 여러 ‘현대판 장발장’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이유에 대해, 이들에 대한 처벌보다는 이들보다 중한 죄를 짓고도 중한 처벌을 받지 않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김 변호사는 “절도를 한 이들에게 처벌을 하는 것에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문제는 누구는 10만원을 훔쳤는데 실형이 나오고 누구는 10억원을 횡령했는데 집행유예가 나오는 그런 것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실제 ‘현대판 장발장’들과 횡령이나 배임, 뇌물수수 혐의를 받는 소위 ‘힘 있는 자들’ 또는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흉악범들에 대한 형량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일이 종종 벌어지기도 합니다.
지난달 고시원에서 배가 고파 달걀 18개를 훔쳤다가 검찰로부터 징역 1년 6월을 구형 받은 일명 ‘코로나 장발장’ 역시 큰 논란이 됐는데요. 네티즌들은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W2V)’ 운영자 손정우와 같은 형량을 구형했다며 사법부를 강하게 비난했고 결국 해당 재판부는 “살아 온 배경을 다시 살피겠다”며 재판을 다시 열기로 했습니다.
반면 한국e스포츠협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롯데홈쇼핑으로부터 500만원 상당의 기프트 카드를 받고 e스포츠협회 자금 5370여만 원을 횡령하고 정치자금 2000만원을 위법하게 받은 전병헌 전 국회의원은 유죄로 인정됐음에도 실형이 아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습니다.
또 지난 2008년부터 2018년까지 협력업체 대표로부터 납품거래 유지 등을 대가로 6억1500만원을 수수하고 2008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타이어 계열사 자금 2억6000여만원을 빼돌린 조현범 한국테크놀로지그룹(옛 한국타이어) 사장 역시 지난 4월 1심에서 유죄를 인정받고도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죠.
김 씨에 대한 처벌은 응분의 처분이겠지만 수천·수억 원을 빼돌리거나 인면수심 성범죄를 저지른 이들에 비해 더 무거운 형을 받는다면 이는 마땅히 대중의 분노를 살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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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사점은 바로 ‘상습’입니다. 통상 ‘현대판 장발장’들은 생계를 위해 한 번 범죄를 저질렀다가 전과자가 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다시 생계 곤란을 겪는 악순환에 처하게 됩니다. 그나마 벌금형이 내려진다 해도 벌금을 완납하지 못하면 노역에 처해져 징역형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에 직면하게 되죠. 배고픔에 식료품을 훔치면 이후 더 절박한 생계의 위협을 느껴 죄를 짓게 되는 이른바 ‘죄의 굴레’에 빠지게 되는 셈입니다. 이들이 죄의 굴레에 빠지기 전,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나라고 되묻게 되는 지점입니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코로나 장발장’의 경우 코로나 사태 때문에 일도 못하고 무료 급식소도 닫아 열흘 동안 굶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생계비와 의료비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이를 알지 못해 혜택을 받지 못했는데요. 건강보험과 재산세 납부 등 자료가 없어 당국에서도 복지 대상자인지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지난 4월 대구에서는 생선 한 마리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힌 한 50대의 안타까운 사연도 알려졌는데요. 그는 오래전 교통사고로 다리 한쪽이 불편해진 뒤 형편이 어려워지자 생선을 한 마리씩 훔치며 끼니를 해결했다고 합니다. 그는 기초생활수급 정책에 대해 알지도 못해 소외돼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김범중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현실적으로 완벽히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는 없다면서도 “복지 사각지대를 높은 수준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직접 찾아가는 ‘아웃리치(outreach·지역 주민에 대한 기관의 적극적인 원조 활동)’와 적절한 홍보를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김 교수는 “아웃리치는 기존 신청한 사람을 위한 복지서비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람을 발굴하기 위한 서비스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복지전담 공무원 1인당 감당할 수 있는 고객 숫자가 너무 많다”며 “결국 복지 전담 공무원 숫자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현재 한국의 사회보장 지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대비 매우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현 정부가 복지서비스 확충에 대한 정책적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은 다행입니다. 구체적으로 정부는 공공서비스분야 일자리를 늘린다는 원칙 아래 사회복지전담 공무원도 향후 증원할 계획입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사회복지 업무 담당 공무원을 2017년 10월부터 2022년까지 1만2000명 증원하겠다는 계획이 있다. 지자체에 공지를 하고 채용을 독려한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