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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만엔권 새 얼굴 시부사와, 117년전 조선 최초 은행권 모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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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슬 기자I 2019.04.09 16:27:14

제일은행장 맡고 있던 1902년 조선 첫 은행권 발행
조선 중앙은행 욕심 냈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퇴짜
경인철도회사·농업척식회사 설립해 조선 수탈 앞장
日서는 일본경제 설계자로 칭송…노벨평화상 후보도

△1902년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은행장으로 있었던 제일은행이 한국에서 발행한 1원짜리 지폐. 시부사와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일본이 다음 달부터 연호를 ‘헤이세이’(平成)에서 ‘레이와’(令和)로 변경하는 것에 맞춰 지폐 디자인도 바꾼다.

1만엔권은 일본 근대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서 일본 최초의 상업은행장이었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英一)로, 5000엔권은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우(부수 <나무목>+通口一葉)에서 여성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쓰다 우메코(津田梅子)로 교체한다.

1000엔권은 매독균을 발견한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 대신 페스트균과 파상풍 치료법의 개발자인 기타사토 시부사부로(北里柴三郞)로 도안을 변경한다. 일본이 지폐 도안을 바꾸는 것은 2004년 이후 약 15년 만이다.

117년전 조선 최초 은행권 모델 ‘시부사와’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1만엔권의 주인공인 시부사와다. 사실 그가 지폐 도안의 주인공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인 1902~1904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행된 지폐에 실린 인물이 시부사와다.

일본인인 시부사와가 조선에서 발행한 첫 지폐의 주인공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설립한 제일은행이 조선에서 처음으로 지폐를 발행했기 때문이다. 일본 최초의 상업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은 1878년(고종 15년)에 조선에 진출한 뒤 대한제국 정부와 해관세(海關稅) 취급 계약 및 대부 계약을 체결해 재정을 장악하는 등 중앙은행 역할을 했다.

1901년 대한제국이 금본위제도 채택과 외국 돈의 유통 금지를 골자로 한 화폐제도 개혁을 추진하면서 일본 화폐 통용을 금지하자 당시 제일은행장이었던 시부사와는 1902년 일본 대장성의 허락을 받아 사실상 화폐나 다름없는 ‘무기명식 일람불(一覽拂)’ 어음을 발행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행된 은행권(1원·5원·10원)에 시부자와의 얼굴이 새겨진 배경이다.

△일본정부가 새롭게 찍어내겠다고 발표한 1만엔 도안
지불준비금 적립 등 법정화폐로서 갖춰야할 기본은 무시한 채 발행된 제일은행권은 대한제국의 경제를 뒤흔들었다. 이에 질세라 청나라 상인들도 비슷한 ‘어음’을 유통시키면서 엎친데 덮친 격이 됐다. 상인들이 임의로 발행한 어음이 ‘화폐’ 행세를 하며 돌아다니자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대한제국 신용경제는 뿌리부터 흔들렸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대한제국 정부는 제일은행권과 청의 어음에 대한 유통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안돼 일본의 해금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군함 3척을 동원한 일본의 무력시위와 협박에 굴복한 것이다.

강제로 준(準)법정화폐의 지위를 차지했지만 제일은행권의 사용량은 크게 늘지 않았다. 민간의 저항 때문이었다.

보부상 단체와 인천지역내 상인들은 제일은행권 배격운동을 벌였다. 시부사와는 제일은행권 도안에서 자신의 얼굴을 빼고 화홍문·광화문·주합루 등 조선의 건축물로 교체하는 유화책을 펼치기도 했다.

조선 중앙은행 욕심 냈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퇴짜

시부사와는 자신이 세운 제일은행을 조선의 중앙은행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조선 땅에 세울 은행 건물의 설계를 일본은행 본점을 설계했던 다쓰노 긴고에게 맡기기도 했다.

당시 조선 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시부사와가 대장성 근무했을 당시 상사로 친분이 깊었다. 그러나 이토는 조선에도 중앙은행이 별도로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시부사와의 청탁을 외면했다. 이토는 제일은행을 조선의 중앙은행으로 인정해달라는 시부사와의 요청에 “그러러면 제일은행 본점을 조선땅으로 옮기라”고 단박에 거절했다.

조선의 중앙은행을 차지하겠다는 꿈은 무너졌지만 시부사와는 그후로도 일본이 조선을 수탈하는데 있어 선봉에서 맹활약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노선인 경인선을 놓은 곳은 시부사와가 운영했던 ‘경인철도 합자회사’다. 대한제국은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사업가 J.R.모스에게 부여했으나 자금난을 겪던 모스는 이 권리를 대한제국의 허락도 없이 시부사와에 매각했다.

경인철도합자회사는 1900년 7월 8일 경인선을 개통했다. 이 철도는 이후 일제가 우리나라 구석구석에서 수탈한 자원을 일본으로 실어나르며 일본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했다.

시부사와가 운영하던 조선흥업주식회사는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1만 7000정보(町步·1억 7000㎡)의 토지를 소작제로 경영한 농업척식회사다. 이 회사는 과도한 소작료로 소작인들의 갈등을 겪던 끝에 황해도 소작쟁의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일본서는 日자본주의 설계자로 칭송…노벨평화상 후보도

시부사와는 우리나라와는 여러모로 악연인 인물이지만 막상 일본에서는 “도덕을 선행해야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도덕경제합일주의)라는 신념아래 기업을 경영한 인물로 존경받는다.

그가 집필한 ‘논어와 주판’은 유교적 기업 경영이념과 상도를 설명하며 기업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단순한 개인의 영리가 아닌 아닌 사회적 기여와 공익이라고 강조했다.

도쿄전력, 도쿄가스, 오사카방적회사, 시미즈건설, 도쿄해상동일화재보험, 제국호텔, 오지제지 등 시부사와가 1931년 91세로 사망할 때까지 직접 세웠거나 설립 때 참여한 기업만 500여개다. 삿포로맥주와 임페리얼호텔, 도쿄경제대학, 히토쓰바대학도 유례를 거슬러 올라가면 시작점에 그가 있다. 그를 근대 일본 경제의 설계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말년에는 1902년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 미·일 양국 경제 교류를 추진하며 민간 경제 외교가로 활동했다. 대규모 경제 실업단을 미국에 파견하고 미국 산업박람회에 참여해 기술과 자본을 유치했으며 미·일 상공업계의 조직적 유대관계를 구축했다. 1920년대 중국에서 대기근이 발생하자 구호에 앞장서 1926, 1927년 연속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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