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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정은 왜 기업은행에서 1조원 이란 자금 빼갔나(종합)

김인경 기자I 2020.04.21 17:20:10

기업은행, 美 검찰·뉴욕주금융처에 8600만달러 벌금내기로
2011년 재미교포 사업가 이란자금 위장거래에 연루
HSBC 2조원·日미쓰비시UFJ 3000억원 벌금보단 적어
"이미 마련한 충당금 내 처리"…유동성 우려는 여전

[이데일리 김인경 기자] IBK기업은행이 미국 검찰과 뉴욕주 금융청에 1000억원 규모의 벌금을 내게 됐다. 지난 2011년 국내 한 무역업체와 이란의 자금 거래를 중개하는 과정에서 자금세탁방지 프로그램을 제대로 준수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기업은행, 6년 만에 1000억원 벌금으로 합의

2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과 기업은행에 따르면 기업은행은 6년간의 조사를 마치고 미국 검찰에 5100만달러(622억원), 뉴욕주 금융청에 3500만달러(427억원) 등 총 8600만달러(1049억원)의 벌금을 내기로 합의했다. 미국 검찰이 2014년 5월 조사에 착수한 지 6년 만이다.

사건은 2011년 2월로 올라간다. 당시 70대였던 미국 알래스카 시민 케네스 정(Kenneth Zong)씨는 두바이 대리석을 수입해 이란에 수출하는 것처럼 위장, 기업은행 뉴욕지점에 이란 중앙은행 명의로 예치된 이란 자금 1조948억원을 수령했다.

그런데 2010년 미국은 이란에 대해 세컨더리보이콧(이란 원유를 수입하는 제3국과 미국 기업이 거래를 할 수 없도록 한 조항)을 발효한 바 있다. 다만 한국은 당시 예외국으로 적용됐다. 그래서 기업은행은 한국-이란의 거래대금이 한국 밖으로 송금되지 않도록 관리를 하는 조건으로 이란 중앙은행이 기업은행 계좌를 이용해 원화로 양국의 무역대금을 결제하는 ‘원화-이란 결제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다. 즉, 이란에서 원유를 들여올 때 수입대금을 기업은행의 이란 중앙은행 계좌에 넣어두면 이란에 수출하는 업체가 수출대금을 이 계좌에서 인출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하지만 정씨는 이란 중앙은행의 1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우리 금융 당국에 신고도 하지 않고 인출했다. 이후 아들인 미첼 정의 명의로 된 미국 회사 등 5~6곳으로 나눠 송금했다. 이란 자금이 미국을 비롯한 해외로 반출이 된 것이다. 게다가 이 회사는 직원 1명에 불과한 페이퍼컴퍼니였다. 이란 측은 정씨에게 107억원의 자금을 커미션으로 제공했다. 이에 이란 고위층이 깊숙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일었다.

결국 한국 검찰은 2013년 정씨를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으로 구속기소했다. 다만 기업은행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내부 공모나 범행을 묵인한 정황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이었다. 미국 검찰과 금융당국은 테러국인 이란과 연관된 문제에는 가뜩이나 예민하다. 특히 자금세탁 의혹도 있는 만큼, 사소한 부분도 놓쳐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미국 검찰은 케네스 정을 자금세탁방지법 위반 등 47건의 혐의로 기소했다.

이와 함께 기업은행에 대한 조사도 착수, 자금세탁방지 컴플라이언스 미비를 문제로 삼았다. 결국 기업은행은 6년간의 수사 끝에 뉴욕지점의 자금세탁방지 프로그램이 미국 법령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 점을 수용하고 미국 검찰과 금융청과 8600만달러의 벌금에 합의했다.
기업은행[이데일리DB]
해외 제재에 비하면 ‘선방’이지만… 유동성 우려 여전

기업은행이 미국 검찰에 내야 할 5100만달러를 이미 납부한 상태다. 다만 뉴욕주금융청에 내야 할 3500만달러는 아직 대기 중이다. 기업은행은 이 금액이 적립된 충당금 내에서 처리한다고 밝혔다.

기업은행은 “현재 효과적인 자금세탁 방지 프로그램을 갖췄고 뉴욕주 금융청도 기업은행 뉴욕지점의 자금세탁방지 프로그램이 적절한 상태(2019년 기준)에 있다고 평가했다”면서 “관련 법령 준수는 물론, 국내외 관계당국과 지속적으로 협의해 자금세탁 방지 등 컴플라이언스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개선하고 유지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기업은행의 벌금 수준은 글로벌 투자은행인 HSBC나 일본 은행 등의 처벌 수준에 비하면 낮다. HSBC는 미국 제재를 회피해 이란과 리비아, 수단 등과 거래한 혐의와 돈세탁 방지 위반 혐의 등으로 2012년 뉴욕동부지검으로부터 19억2000만달러(약 2조3600억원)의 벌금으로 합의한 바 있다. 미국의 스탠다드차타드(SC) 역시 2012년 6억6700만달러(8200억원)의 벌금으로 합의했고 일본 최대은행 중 하나인 미쓰비시UFJ는 돈세탁 방지 위반으로 2억5000만달러(3073억원) 벌금의 제재를 받은 바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뉴욕주금융처를 인용해 “기업은행이 몇 년에 걸친 조사에서 실질적으로 협력한 만큼, 벌금이 줄었다”고 보도했다. 국내 금융권 역시 벌금이 예상만큼 많지는 않았다고 평가한다. 또 ‘미국발 제재’라는 불확실성을 해소한 만큼,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기업은행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금융 지원을 늘리기 위해 3월과 지난 17일 2640억원과 4125억원의 증자를 하는 등 자금 상황이 좋지 않다. 이 가운데 이번 미국과의 합의가 이어지며 유동성에 대한 우려는 계속 커지고 있다.

실제로 기업은행의 21일 종가는 7480원으로 연초보다 36.8%나 하락했다. 기업은행을 포함한 9개의 은행·금융지주를 합산·도출한 KRX은행지수가 31.4% 하락한 가운데 기업은행의 약세는 더 가파른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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