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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투표 첫날인 이날 오전 서울 성북구의 한 오피스텔. 이곳 우편함 90여 개 중 47개에는 선거 공보물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앞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지난 18일과 25일 전국 2400만 가구 우편함에 후보들의 공보물을 배달 완료했다. 1차로 발송된 책자형과 2차로 발송된 전단형 모두 거주자가 가져가지 않아 꽉 찬 우편함도 여럿 보였다.
대단지 아파트도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지난 26일 찾은 서울 강남구의 한 아파트에선 우편함 150개에 공보물이 띄엄띄엄 방치돼 있었다. 우편함 앞에서 만난 20대 석재현씨는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굳이 안 봐도 될 것 같다”며 공보물을 뺀 우편물을 챙겨갔다. 이 아파트 입구 바로 옆에 있는 분리수거장에는 봉투의 수신인 주소 부분만 뜯겨 있거나, 아예 뜯기지도 않은 공보물이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아파트 경비원 A씨는 “선거가 끝나도 안 가져가서 나중에는 한쪽에 놔뒀다가 개인정보 때문에 한 번에 폐기해 버린다”고 말했다.
이렇게 버려지는 선거 공보물을 발송하는 데에만 수백억 원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선관위에 따르면 이번 21대 대선에서 공보물 발송 예산으로만 370억원가량이 편성됐다. 지난 20대 대선 당시에는 320억원이 쓰였다. 공보물은 가구마다 배송되고 선거가 끝난 뒤 따로 수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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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억원을 들인 공보물이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하자 발송 방법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스마트폰 등 온라인 상으로 공약집을 볼 수 있는데 굳이 종이 공보물이 필요하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직장인 정승호(56)씨는 “뉴스도 다 스마트폰으로 앉아서 검색하는 판에 우편물을 돌리면 그게 다 자원 낭비”라며 “이제는 온라인으로 공보물을 볼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공보물을 읽지 않고 사전투표에 다녀왔다는 김모(74)씨는 “아무리 나랏돈이라지만 절약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고 했다.
국회엔 관련 개정안도 발의돼 있다.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0인은 지난해 9월 선거공보물을 우편 발송하지 않고 문자로 발송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소관위원회 심사에선 전화번호 공유로 인한 개인정보 유출·침해 우려 등을 이유로 법안이 계류되고 있다.
다만 일부 시민은 디지털 접근이 어려운 유권자에겐 여전히 인쇄물 형태의 공보물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기한다. 전자 형태의 공보물보다 종이 형태가 더 읽기 쉽다는 의견도 있다. 대학원생 최혜림(27)씨는 “후보들이 직접 정리한 공약을 한 번에 정리해 둔 게 공보물인데 종이로 봐야 한눈에 비교하기 쉽고 결정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여러 목소리를 반영해 공보물 발송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제언했다. 세금 고지서처럼 전자 형태와 종이 형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식이다. 공보물 발송 방법을 바꿀 수 없다면 재생 용지를 100% 사용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 관련 법안은 국회에서 지난 회기 때 발의됐으나 폐기됐다. 임성희 녹색연합 그린프로젝트팀장은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닌데 의지가 없는 것”이라며 “전산 공보물을 원칙으로 하고 접근성이 낮은 사람은 재생 용지를 사용한 인쇄물을 제공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