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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는 왜 왕의 얼굴을 그리지 못했나

김성곤 기자I 2015.12.17 17:06:07

조선미 성균관대 명예교수 ‘조선왕조의 어진’ 특강
“김홍도 어진화사 3번 선발되고도 주관화사는 못해”
“어진 털 끝 하나라도 틀리면 안된다는 원칙”
“1954년 부산 화재로 어진 소실 민족사적 비극”

보물 제932호 ‘영조 어진’(1900). 경운궁 선원전에 봉안하기 위해 모사해 제작한 어진. 원본은 1744년 제작된 영조 어진으로 어진화사 장경주가 주관화사로 참여했다(사진=문화재청)


[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왕의 초상화를 뜻하는 ‘어진’은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춘 화가들이 그렸다. 조선시대 어진 제작을 담당하는 이들은 ‘어진화사’로 불렸다. 당대 화가 중 가장 공교하다는 자들을 대신들이 천거해서 그 중 제일 실력이 뛰어난 자를 선발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의 천재 화가로 불린 단원 김홍도는 어땠을까? 김홍도는 어진화사에 세 번이나 선발됐지만 단 한 번의 왕의 얼굴, 용안을 직접 그리지는 못했다. 왜일까?

국내 초상화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조선미 성균관대 예술학부 명예교수가 흥미로운 비밀을 풀어냈다. 조 교수는 17일 오후 서울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 본관 강당에서 열린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특별전 연계 특강에서 조선왕실의 어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날 특강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200여명의 청중들이 몰렸다.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어진화사들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집필화사로 불리는 주관화사는 왕의 얼굴인 용안을 담당했다. 동참화사는 집필화사에 버금갔던 이들로 용체의 주요하지 않은 부위를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수종화사는 채색하는 일을 도왔다. 참여하는 화원의 수는 대략 6인 정도였는데 경우에 따라 13인에 이르기도 했다.

실제 어진 제작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왕의 얼굴, 즉 ‘용안’을 본다는 게 주관화사마저도 쉽지 않았기 때문. 조선 영조 때의 경우 왕이 얼굴을 자주 보여주지 못해 주관화사가 똑같이 그려내지 못해 낭패를 겪었던 경우도 있었다.

조 교수는 “김홍도가 얼마나 뛰어난 화가인가. 인물화도 잘 그려서 세 번이나 어진화사에 선발됐지만 단 한 번도 주관화사에 뽑히지 못했다”며 “호방한 필치는 뛰어났지만 털 끝 하나라도 놓치려는 필치는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조선시대 초상화는 ‘털 끝 하나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는 명제가 있었다. 어진은 더욱 그랬다”면서 “영조 어진에서 나타나듯이 수염을 그려놓은 것을 보면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그려냈다. 중국 초상화의 수염 묘사는 도식적이고 과장된 면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털 끝 하나라도 놓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어진은 단순히 하나의 예술작품이 아니다. 어진은 왕 그 자체였다”며 “어진 제작 단계는 엄중했다. 어진을 모시는 진전에 화재가 나면 왕은 소복하고 사흘간 곡을 했다. 진전 근처에서 화재가 나거나 큰 비나 눈이 내리면 위안제를 지냈다”고 설명했다.

한편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태조 진전을 서울, 영흥, 평양, 개성, 경주, 전주 등 무려 6곳에 세웠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순종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숫자의 어진이 제작돼 진전에 봉안됐지만 현존하는 것은 태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 어진 등에 소수에 불과하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던 진전 봉안 어진들은 1921년 신선원전에 집결 봉안됐는데 모두 48점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어진들은 부산 용두산 소재 벽돌창고에서 보관했다. 이후 1954년 12월 서울로 되돌려오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던 중 화재가 발생해 대부분의 어진들이 궁중유물 3400점과 함께 소실됐다.

조 교수는 “우리 민족에게는 실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며 “그 당시 소실된 어진을 사진으로라도 찍어뒀다면 후대에라도 되살릴 수 있었는데 어진 자체를 왕으로 여겼기 때문에 사진을 찍어둘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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