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베이징=이데일리 이준기·김인경 특파원] 환율조작국 지정은 ‘최후의 카드’였다. 칼집에서 꺼냈다간 파국으로 치달을 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발발 이후 그동안 미국이 중국을 위협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했을 뿐 실제 행동에 나서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5일(현지시간) 결국 미국이 칼을 빼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추가 관세 부과 결정에 대해 중국이 위안화 가치 하락을 용인하며 대응하자, 곧바로 ‘환율조작국 지정’이라는 반격의 카드를 꺼냈다. 양국의 무역갈등이 관세 전면전에 이어 환율전쟁으로까지 치달으면서 글로벌 경제의 침체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 약점 노린 中… 31년 전 법 끄집어낸 美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미국이 환율조작국 지정카드를 꺼내 들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난 5월 발표한 미국의 상반기 ‘주요 교역국의 거시경제 및 환율정책 보고서’(환율보고서)에서 중국은 한국과 같은 관찰대상국 수준에 머물렀다. 미국이 보고서 제출한지 3개월이 시점에서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전격 지정한 건 예상 못한 ‘파격’이다.
미국이 애초 제시했던 환율조작국 지정 기준은 △현저한 대미 무역수지 흑자(200억 달러 초과) △상당한 경상수지 흑자(GDP 대비 3% 초과) △환율시장의 한 방향 개입 여부(GDP 대비 순매수 비중 2% 초과) 등 세가지다. 이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경우 심층분석대상국, 즉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다. 당시 중국은 미국을 상대로 한 무역흑자가 200달러를 초과해 한가지 기준에만 해당됐다. 이 기준대로라면 중국은 절대로 환율조작국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이 1988년 만든 종합무역법에 따르면 구체적인 세부 기준 없이도 미국을 상대로 무역흑자가 많으면 얼마든지 환율조작국을 지정할 수 있다.
중국이 5일 위안화 가치를 달러당 7위안 아래로 떨어지는 ‘포치(破七)’를 사실상 용인하면서 미국의 관세 부과를 무력화시켰다는 게 미국 측의 판단이다.
중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린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 상무부가 6일 성명을 통해 중국 기업들이 미 농산물 구매를 중단했다고 밝힌 데 이어 지난 3일 이후 들여온 미국 농산물에 대해 관세부과를 배제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점이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를 폭발시켰다는 것이다.
중국 측의 반격 전략은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인 미국 농민들을 정조준하고 있다. 가뜩이나 대두 등 농산물에 부과된 중국의 보복 관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국의 농민들이 또다시 미중무역전쟁의 희생양으로 전락하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등을 돌릴 가능성도 있다. 내년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냥 두고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
미국의 ‘환율조작국’ 카드에 중국도 강경 대응하는 분위기다. 중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환율조작국’ 카드가 나온 지 반나절도 되지 않은 6일 오전 9시(중국 시간) 중국 인민은행은 위안화 기준환율을 1달러당 6.9682위안으로 고시했다. 달러와 비교한 위안화 가치를 전날보다 0.66% 더 내린 것이다. 고시 이후 역외시장에서의 위안화 환율은 한때 달러당 7.14위안까지 치솟았다.
환율조작국 지정에도 불구하고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위안화 가치 절하를 용인한 만큼, 시장은 미중간의 무역전쟁이 더욱 격화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미국의 투자은행 드렉슬 해밀턴의 자문위원인 이언 와이너는 “위안화 가치 하락을 억제하며 환율조작국 딱지를 피하려던 중국은 이제 거칠 게 없게 됐다”며 당분간 중국이 위안화 절하 행보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보니 글레이저 아시아 담당 선임 연구원 역시 “타협 가능성은 이미 지나갔다”고 잘라 말했다.
중국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국 관영매체들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환구시보는 “무역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미국이 시작한 방자한 게임에는 끝까지 싸우겠다”며 “모든 것은 미국이 자초한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중국은 빠르게 성장하는 내수시장이 있고 그에 따른 잠재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무역전쟁이 장기화하더라도 내수시장을 키워 버티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환율조작국 결정은 중국 전·현직 지도부가 모여 국정 방향을 결정하는 ‘베이다이허(北大河) 회의’가 한창 열리던 중에 벌어졌다. 공산당 최고위층이 다 모인 자리에서 미국으로부터 일격을 받은 셈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입장에서는 자존심에 상할만한 상황이다. 중국이 강경 대응에 나서는 배경이다.
미국도 달러가치 하락으로 맞서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에 중국의 포치 용인을 공격하면서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듣고 있나”라고 말했다. 중국의 위안화 가치 하락에 맞서 달러 가치 하락을 위한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를 강하게 촉구하는 발언이다.
다만, 중국은 여지를 남겨뒀다. 이강 인민은행장은 “중국은 책임감 있는 대국으로 시장이 환율을 결정하는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며 “경쟁적 평가절하에 응하거나 환율을 무역전쟁의 수단으로 삼는 행위는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중국이 과도한 위안화 평가절하가 자칫 급격한 자금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걱정한다. 이날 오전 인민은행은 오는 14일 홍콩에서 300억위안(5조원) 규모의 중앙은행증권을 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추가적인 달러 조달과 함께 시중의 위안화 유동성을 일부 흡수하는 조치다. 추가적인 위안화 절하를 막겠다는 속내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