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데일리 김상윤 기자] 대(對) 이란 제재가 해제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기업들이 마음껏 교역대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결제시스템 구축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달러화 거래가 여전히 금지된 상황에서 기존 원화결제시스템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유로화 등 다른 통화 결제시스템으로 다변화를 모색하고 있지만 글로벌 협조가 생각만큼 빠르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평가다.
22일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송인창 기획재정부 국제경제관리관(차관보)은 이달 중순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해 미국 재무부 관계자를 만나 이란과 교역시 유로화 등 이종통화 결제와 관련해 협의했다. 미국 측으로부터 확답은 받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공감대는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과 거래가 많은 이란은 달러화 결제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유로화 결제를 선호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원화는 유로화를 직거래할 수 있는 시장이 없다. 이 때문에 우리 기업들이 대규모 무역거래를 위해서는 원화를 달러로 바꾼 뒤 다시 유로로 환전하는 2중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란과의 교역에서 달러화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간 단계에 달러가 매개체로 이용되는 만큼 법적 불확실성이 있어 미국 측의 유권해석이 뒤따라야 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당초 유로화 등 다른 국제통화를 활용할 수 있는 결제체제가 빨리 만들어질 것으로 봤지만 미국의 여러 절차가 복잡해 늦어진 측면이 있다”면서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유로화 결제시스템 구축에 대한) 공감대는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우려하는 부분은 오히려 미국보다 유럽계 은행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미국의 제재로 수십억 달러 규모의 손실을 봤던 유럽계 은행에서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 한국의 유로화 결제시스템을 허용한 뒤 자칫 불법거래가 이뤄질 경우 미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리스크 때문에 쉽게 나서고 있지 않다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한국 이란 간 교역 대금 결제는 당분간 우리은행, 기업은행 등 국내 지정은행에 개설된 원화 계좌를 이용하는 ‘원화결제시스템’만 이용해야 할 전망이다. 국내기업이 이란으로부터 원유 등을 수입하면 대금을 국내 원화계좌(우리은행, 기업은행)로 입금하고, 이란 중앙은행이 리알화로 석유사에 대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국내 기업이 이란으로부터 사업을 수주하면 이란의 회사가 리알화로 이란 중앙은행에 대금을 납부하고 국내은행이 원화로 수출대금을 지급하는 식이다. 하지만 현재 잔액이 3조~4조원에 불과해 건설이나 조선분야처럼 대규모 수주가 이뤄질 경우 충분하지 않다는 평가다.
홍준표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란 제재가 풀렸다고 해서 당장 기업들의 대형 프로젝트가 활짝 열리는 것은 아니지만 원화결제시스템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향후 늘어날 수주량을 감안할 경우 어려움 없이 다양한 통화로 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대비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