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지난 6월 인도네시아를 찾아 LG에너지솔루션과 LG전자의 배터리·가전 사업 현황을 보고받고 이같은 당부를 했다. 중국이 저가 공세를 통해 시장을 잠식해 가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이 가격 경쟁으로 중국에 맞서기보다는 차별화된 기술력을 통해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발언이었다. 구 회장은 최근 열린 사장단 회의에서도 중국의 공세에 대한 위기의식을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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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L·파라시스 텃밭 뚫은 LG에너지솔루션
8일 업계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10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메르세데스-벤츠와 전기차 배터리 공급계약을 맺었다. 양사는 지난해 10월 북미 및 기타 지역 내 총 50.5기가와트시(GWh)규모의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올해 9월에는 유럽과 미국 지역에서 총 107GWh의 대규모 계약을 맺었다. 업계에서는 3건의 공급계약 규모만 십수조원이 넘어가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어 이날 2조600억원 규모 전기차 배터리 공급계약을 추가로 발표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그동안 CATL과 파라시스 등 중국 배터리 업체의 배터리를 채택해 왔다.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메르세데스-벤츠 EQE 300, EQE 350+ 등 전기차 17개 모델 가운데 14개 모델에 중국산 배터리가 탑재된다. 그러다가 지난해 8월 인천 청라 한 아파트에서 파라시스 배터리를 탑재한 EQE 350+ 모델에서 화재가 발생하면서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고, 중국산 배터리 포비아(공포증)가 확산한 이후부터 배터리 공급망 다변화에 나섰다.
이후부터 메르세데스-벤츠와 LG에너지솔루션과의 협력이 강화하기 시작했다. 차세대 전기차 플랫폼을 통해 프리미엄 전기차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려는 메르세데스-벤츠와 차세대 배터리 기술력을 통해 중국 기업들의 공세를 꺾으려는 LG에너지솔루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올라 칼레니우스 메르세데스-벤츠 회장은 지난달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를 직접 찾아 LG그룹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과 ‘여의도 회동’을 하기도 했다. 이날 양사의 추가 배터리 공급계약은 칼레니우스 회장과 LG그룹 계열사 CEO들의 ‘미래차 동맹’ 회동 이후 한 달 만의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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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양사가 공급 계약을 맺은 157.5GWh 규모 배터리는 차세대 원통형 배터리인 46시리즈인 것으로 알려졌다. 46시리즈는 지름 46㎜의 대형 배터리로 기존 2170(지름 21㎜·높이 70㎜) 배터리 대비 에너지 밀도가 5배 이상 높은 제품이다. 고성능 배터리인 만큼 메르세데스-벤츠의 프리미엄급 차량에 탑재될 것으로 관측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연내 오창공장에서 46시리즈 배터리를 양산하고, 내년부터는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서 안정적으로 물량을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이날 추가로 수주한 계약은 메르세데스-벤츠의 중저가 모델용 배터리가 유력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메르세데스-벤츠는 2027년까지 글로벌 시장에 40종 이상의 신차를 출시하겠다는 대규모 전동화 전략을 발표했다. 프리미엄급 모델에 탑재되기 위한 46시리즈 계약이 체결된 만큼, 엔트리급 모델에 들어갈 중저가형 배터리 계약을 추가로 체결한 것으로 관측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고전압 미드니켈 파우치형 배터리,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등 중저가형 모델에서도 미국 등 현지 생산능력을 앞세워 다양한 고객사와 파트너십을 이어가고 있다.
배터리 업계에서는 이번 계약으로 LG에너지솔루션이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극복 신호탄을 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10월 중국 CATL과 BYD의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 기준 합산 점유율은 55%로 절반을 넘었다.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의 합산 점유율은 16%에 불과했다.
메르세데스-벤츠와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 공급 계약은 2028년부터 2038년까지 약 10년간 이어지는 장기 파트너십이다. 차별화된 기술을 통해 구광모 회장이 강조한 ‘5년 뒤 경쟁력’에 집중한 것으로 풀이된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까지 중국 기업들이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며 적극적인 공세로 글로벌 전기차 시장을 장악해 왔지만, 앞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국내 기업들이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