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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물가상승률이 연 0%대로 둔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일반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 물가와 달리 중앙은행들은 ‘저(低)물가’ 현상으로 고민이 깊다. 장기화한 저물가로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지자 한국은행은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을 내놨다. 그러나 둔화하는 경제와 낮은 물가상승률이 결합하면 경제 활력을 저해할 수도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통화정책을 통해 적절히 대응해 나가겠다”며 금리인하 가능성을 재차 내비쳤다.
◇“저물가 중앙은행에 큰 도전…거시·물가안정 두루 살펴야”
이주열 총재는 25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은행에서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을 주제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 같이 말했다.
기준금리를 내리거나 올려 시중 유동성을 조절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것은 중앙은행에게 주어진 주요 책무다.
그러나 경제구조가 장기적 저물가가 고착화하는 구조로 바뀌면서 경기와 물가간의 상관관계가 낮아지고 있다. 금리를 내려도 물가는 낮다. 중앙은행의 목표를 수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쟁도 뜨겁다. 이단아로 취급됐던 ‘현대통화이론(MMT)’이 주목받는 배경이다. 이는 물가와 금리가 낮은 수준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현상이 지속되면서 정부가 돈을 찍어 경기를 부양해도 재정적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주요 요지다.
이 총재는 “물가안정이라는 책무에 충실하게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과 낮은 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중앙은행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이론도 제시되고 있다”며 “중앙은행은 과거에 비해 물가변동에 대응하기 어려워지는 큰 난관에 봉착해있다”고 말했다.
통화정책을 물가만 쳐다보고 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시할 수도 없는 처지다. 물가가 목표치인 2%에서 장기간 괴리될 경우 임금상승률에 영향을 미쳐 경기의 활력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물가가 지나치게 낮게 유지되는 것은 경기에는 나쁜 신호다.
낮은 인플레이션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게도 도전과제다. 낮은 물가는 미국 연준이 금리를 내리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변수로 꼽힌다. 연준은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을 기존 1.8%에서 1.5%로 하향 조정했다. 연준의 물가상승률 목표치인 2%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 총재 역시 “미·중 무역갈등이 심화하고 반도체 회복이 예상보다 지연될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는 만큼 거시경제 안정과 물가 안정을 두루 살펴가며 적절히 통화정책을 펼쳐나갈 필요가 있다”고 “물가는 기간을 두지 않고 중장기적으로 2% 목표를 달성하는 ‘신축적’ 물가목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상 올해 물가상승률 연 0%대 전망…디플레이션 논쟁 부르는 저물가
특히 우리나라 물가상승률이 위험신호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점에서 한은의 고민은 더욱 깊다. 지난 1~5월중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0.6%로 지난해 하반기 1.7%에 비해 큰 폭으로 하락했다. 이는 한은의 물가안정목표(2.0%)를 크게 하회한 것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디플레이션을 겪었던 일본(0.5%)과 불과 0.1%포인트 차다. 가격 변동성이 큰 품목(식료품 및 에너지)을 제외해 한은의 물가안정목표 주요 참고지표로 삼고 있는 근원인플레이션도 이 기간 0.8%를 기록했다.
올해 연간 전망도 0%대로 둔화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이 총재는 “올해 중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지난 4월 전망(1.1%)을 하회할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1%를 밑도는 낮은 흐름 지속할 것”이라며 “(0%대 가능성에 대해) 4월 전망치보다 낮을 것이라고 했으니 (질문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감을 잡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1%를 밑돌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물가상승률이 0%대를 기록했던 것은 외환위기로 국가 경제가 침몰 직전까지 내몰렸던 1999년(0.8%)와 유가 폭락 여파로 물가상승률이 0.7%를 기록했던 2015년 두 해 뿐이다.
다만 한은은 이 같은 물가상승률의 하락이 경제 위기나 디플레이션(마이너스 물가상승률) 상황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최근 저인플레이션은 일부 품목에서 나타난 가격 하락에 따른 것으로 전방위적인 가격 하락으로 번지는 디플레이션 현상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저유가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무상급식 시행 등 복지정책적 요인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 만큼 ‘일시적’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품목별로 보면 석유류가 유류세 한시 인하 조치와 국제유가 상승세 둔화로 지난해 하반기 8.3%에서 -7.6%로 큰 폭으로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개인서비스물가는 외식물가가 높은 상승세를 지속했고, 서비스물가는 전·월세가격 안정으로 집세는 완만한 둔화(0.4%→0.1%) 흐름을 나타낸 반면, 공공서비스물가는 교육·의료·통신 등과 관련한 복지정책 강화로 마이너스 0.3%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