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실장 “쪽지예산 반영된 것 없다”고 했지만…
박춘섭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은 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재정당국 기준으로 볼 때 내년 예산안에는 ‘쪽지 예산’이 반영된 게 없다”고 밝혔다.
쪽지 예산은 통상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 예산이나 특정 사업예산의 편성 또는 증액을 위해 쪽지로 예결위나 예결위 소위 위원에게 청탁하는 것을 말한다. 예산 심의 과정에서 심도 있는 사업 검토가 없는 사업을 예산 심의 막판에 쪽지로 끼워넣기 때문에 국회 의원들의 ‘지역구 챙기기’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기재부와 국회 예결위 등의 의견을 종합하면 박 실장이 얘기하는 ‘쪽지 예산’은 이번 예산안 통과과정에서는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 상임위 심사 과정에서 의원들이 증액한 항목만 4000여건에 예산 규모는 40조원이나 됐다. 통상 매년 증액 요구 예산이 15조~20조 정도인 점을 감안할 때 김영란법 위배 등을 고려해 의원들이 심사과정에 미리 요구사항을 반영한 것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상임위 보고 때 의원들이 발언한 것도 증액요구 일환으로 볼 수 있다”면서 “실제 증액 요구를 문서로 제출할 때 보면 동료의원들의 예산도 스테이플러로 함께 찍어 제출을 많이 했다”고 귀띔했다.
문제는 좁은 의미의 ‘쪽지 예산’만이 사라져야 할 ‘악습’이 아니라는 점이다. 넓은 의미에서 쪽지예산은 정부안에 없던 사업이 국회 상임위원회 심의,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및 예결위 예산안 조정소위원회 심의 등에서 추가로 반영되는 사업을 말한다. 이미 정부가 재원 부족 및 사업타당성 등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려 삭감했던 예산이 국회 통과과정에서 들어가는 것이다.
통상 정부는 5월부터 서너달은 예산을 심의하고 검토를 하지만, 국회의 경우 2주가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증액 심사를 한다. 더구나 증액심사를 하는 예산소소위의 경우 공개를 하고 있지 않아 어떤 예산이 제대로 반영됐는지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권의 ‘쪽지 예산’은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현실이다.
실제 국회에서 확정된 2011년~2017년 예산을 분석해 보면, 매년 ‘쪽지 예산’의 대표격인 사회간접투자(SOC) 예산이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보다 매년 4000여억원씩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상황에 따라 SOC예산 규모는 달라질 수 있지만 마치 담합해 정찰제처럼 일정 규모의 SOC 예산이 국회 통과과정에서 증액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SOC가 충분히 마련된 만큼 사업타당성이 확보된 사업만 추진하겠다면서 SOC예산을 올해보다 무려 1조9000억원(-8.2%)이나 줄였지만, 국회 통과과정에서 또다시 4000억원이 증액된 것이다.
예산실 관계자는 “이번에 증액된 SOC사업 200여건 중 90%는 정부안을 만들 때 심사과정에서 우선순위가 밀렸던 사업”이라면서 “정부가 국회 증액과정을 감안해서 예산을 짜는 것은 아니지만 통상 SOC예산이 4000억 정도 늘어날 것으로는 예상하는 것은 사실이다”고 설명했다.
◇“예결위 소소위 공개하고 예정처 독립해야”
전문가들은 예산안 심사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게 ‘성역’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지적한다. 상임위나 예결위 전체회의 경우 회의를 공개하고 회의록을 남기지만, 실제 예산 세부내역이 뒤바뀌는 증액심사소소위원회는 비공개 심사로 하는 것을 더는 묵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상헌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재정학)은 “지역구 이해관계가 달린 문제라 국회의원이 움직이지 않으니 악습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라며 “회의를 공개하고, 예산 심의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회 예산정책처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식의 논의를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실장도 이런 넓은 의미의 쪽지 예산이 문제가 있다는 점을 에둘러 표현했다. 그는“(충분한 심사를 거치지 못한) 쪽지예산을 없애기 위해서는 증액심사과정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본다”면서 “심사방식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 여러 면을 종합적으로 봐서 국회 차원에서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