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이 유럽, 남미의 강호에 패한 뒤 자주 볼 수 있던 신문 헤드라인. 국가대표 선수들의 투혼을 칭찬하며 잘 싸웠다는 이 말은 사실 패배의 아픔을 감추려는 ‘정신승리’의 수사(修辭)일 뿐이었다.
구글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와 한 판 혈전을 치른 이세돌 9단에게 이 말이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세돌은 패했다. 그러나 패하지 않았다. 이세돌에게 이번 이벤트는 단순한 일국이 아니었다. 인류 전체의 자존심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렸지만 결국 승리를 따냈다. 그는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우리를 대신해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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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승부는 일찌감치 갈렸다. 5대0 완승 혹은 1패로 우세를 확신했던 이세돌은 알파고의 견고한 행마에 연일 고개를 떨구며 돌을 던졌다. 9일 1국에서 이세돌은 특유의 변칙수로 알파고를 공격했다. 그러나 알파고의 정석 대응에 막히며 186수만에 불계패했다. 10일 2국에서 이세돌은 전략을 바꿔 극도로 견고한 ‘수비 바둑’을 뒀으나 역부족이었다. 211수만에 불계패. 12일 3국에서는 초반에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묻지마 공격 바둑’으로 알파고를 흔들었지만 또 불계패했다. 1200대의 수퍼컴퓨터에 인간은 안 되는 것인가. 시리즈 패배가 확정되자 대국이 열린 서울 포시즌스호텔 대국장은 찬물을 끼얹은듯 가라앉았다.
모두가 힘들다고 고개를 저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기적이 아니었다. 이세돌은 결국 본인의 장기인 공격 바둑으로 돌아가 알파고를 뒤흔들었다. 당황한 알파고는 악수와 자충수를 거듭하며 자멸했다. 물샐 틈 없는 수퍼컴퓨터의 계산을 인간의 직관으로 비집고 들어가 무너뜨린 ‘쾌승’이었다. 결국 최종 5국에서도 알파고의 단단한 계산을 넘지 못했지만 1승의 감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김지명 바둑 캐스터(아마 5단)는 “3패를 하고 1승을 했는데 (이 9단이) 이렇게 국민적인 영웅이 된 것을 보며 뜨거운 감동을 느낀다. 3승을 한 뒤 1패를 했다면 이런 대대적인 응원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기계가 흉내낼 수 없는 인간의 힘을 인간 이세돌이 바둑을 통해 보여줬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의 가공할 위력 ‘딥마인드’
알파고를 만든 구글 딥마인드에도 아낌없이 박수를 쳐 줄 만 하다. 이번 대국에서 4승을 거두면서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인간을 위협하는 ‘스카이넷’처럼 ‘공공의 적’ 이미지를 갖게 됐지만, 인간계 최고수 이세돌을 꺾으면서 인류에게 경이로운 인공지능의 세계를 뇌리에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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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원도 이날 5국이 끝난 뒤 알파고에 사상 최초로 ‘명예 프로 9단’을 수여하며 예우했다. 박치문 한국기원 부총재는 “알파고는 상당히 참신하면서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는 실력을 보여줬고 명예 프로 9단을 수여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실력을 가졌다”고 극찬했다.
◇인공지능, ‘풀뿌리’부터
그러나 알파고를 바라보는 우리의 심경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이세돌이 인간의 자존심을 세워줬다고 하지만 더욱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인간계 바둑 최고수를 꺾는 기술을 만드는 동안 우리의 인공지능 수준은 걸음마 단계다. 인공지능을 위시한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가 눈앞에 와 있는데 ‘알파고’의 기습에 넋을 놓고 당한 것이다.
딥마인드를 인수한 구글뿐만 아니라 글로벌 기업들은 앞다퉈 인공지능 관련 스타트업을 사들이며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컴퓨터 자판 자동인식 기술을 보유한 ‘스위프트키’를, 아마존은 인공지능 플랫폼 업체 ‘이비테크놀로지스’를, 애플은 인공지능 음성인식 기술 업체 ‘보컬IQ’를 사들였다. 수준 높은 기술력의 풀뿌리 업체들과 거대 기업이 합작하고 있는 동안 한국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이준정 박사(미래탐험연구소 대표)는 “현재 미국에서는 인공지능 기술로 무장한 스타트업들이 실리콘밸리를 뒤집어 엎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인공지능의 세상 속에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딥마인드의 이번 활약에서 볼 수 있듯이 스타트업의 창의적인 활약이 미래 인공지능 산업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데 핵심 요소”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