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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의 약속' 이상의 성과 거뒀지만…JY 그래도 "마음 무겁다"

김상윤 기자I 2021.11.24 17:51:47

5년 만에 미국 출장길…역대 최대 규모 투자
테일러 공장, 시스템반도체 1위 핵심 기지 역할
"현장의 목소리 듣고 시장의 냉혹한 현실 봤다"
반도체법 국회에서 공전…"뛸수 있는 환경 필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미국 출장을 마친 뒤 24일 오후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귀국해 건물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김상윤 최영지 배진솔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6년 이후 5년 만에 나선 미국 출장길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미국 투자의 마침표를 찍었다. 텍사스주(州) 테일러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공장 입지를 최종 결정하면서 삼성전자는 현재 건설 중인 경기 평택 3라인과 함께 기흥·화성~평택~미 텍사스를 잇는 글로벌 시스템반도체 생산체계를 공고하게 구축하게 됐다.

미 대륙 동·서부를 ‘종횡무진’ 했던 이 부회장은 정·관·재계 주요 거물들을 만나 반도체뿐만 아니라 백신협력, 한미 안보 구축 등과 관련해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등 가석방 당시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한마디는 “마음이 무겁다”였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AI 등 미래 기술 패권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한국의 미래가 캄캄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밝힌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국회에서 한목소리로 지원하겠다는 반도체 지원 특별법 등은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이 부회장 “투자 결정 내렸지만, 마음이 무겁다”

삼성전자는 23일(현지시각) 미국 텍사스 주지사 관저에서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그렉 애벗 텍사스 주지사, 존 코닌 상원의원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고 170억달러(약 20조원)를 투자해 테일러에 신규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한다고 밝혔다. 이는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 중 역대 최대 규모이다. 김 부회장은 “올해는 삼성전자 반도체가 미국에 진출한 지 25주년이 되는 해”라면서 “테일러 신규 반도체 생산라인 투자 확정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테일러 신규 라인은 내년 완공하는 평택 3라인과 함께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 달성을 위한 핵심 생산기지 역할을 할 전망이다. 이 부회장은 2019년 4월 “메모리에 이어서 파운드리를 포함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확실히 1등을 하겠다”며 “의지와 열정, 그리고 끈기를 갖고 도전해서 꼭 해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생산 및 연구개발(R&D) 분야에 171조원을 투자해 핵심 역량을 확보할 계획이다.

테일러 공장 신규라인에는 첨단 파운드리 공정이 적용된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등 빅테크 기업의 수요를 사로잡기 위해서다. 삼성전자는 5G 이동통신, 고성능컴퓨팅(HPC), 인공지능(AI) 등 다양한 첨단 시스템 반도체를 생산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투자로 미국 현지에서 1800개의 양질의 일자리 창출은 물론 국내 고급 인력 양성 및 R&D 강화라는 선순환 효과를 볼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에 공장이 확장되더라도 첨단 R&D는 한국에서 주로 이뤄지는 탓에 늘어나는 파운드리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국내 고급일자리 창출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시스템반도체 1위 도전은 간단치 않다. 파운드리 1위인 TSMC(58%)와 삼성전자(14%)의 점유율의 격차는 상당한 편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정부의 대폭적인 지원을 받는 인텔의 추격도 물리치면서도 TSMC를 잡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이 부회장은 이날 김포공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에서 기자들과 만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비즈니스 파트너들을 만나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어 좋은 출장이었다”면서도 “(테일러 파운드리) 투자 결정도 내렸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직접 보고 오니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메모리사업에서 일단 초격차를 확보한 이후 이제 시스템 반도체 역량을 쌓아 격차를 줄이고 있다”며 “1980년대 사실상 ‘무(無)’에서 메모리반도체 사업을 시작해 세계 1위에 오른 것처럼 시스템반도체 역시 목표를 세우고 본격적인 도전에 나선 만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올해 약속했던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특별법은 국회에서 여전히 공전 중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4월1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열린 반도체 공급망 복원에 관한 최고경영자(CEO) 화상 회의에 참석해 실리콘 웨이퍼를 들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민간 외교관’ 역할한 JY…백악관도 화답

재계에서는 이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글로벌 경영 행보와 방미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이번 방미 중에 바이오, IT 주요 최고 경영진뿐만 아니라 주요 정·관계 핵심인사들을 접촉하는 등 강행군을 이어갔다. 백신, 반도체에 이어 한미 동맹 강화 등 사실상 문재인 정부가 이 부회장 가석방 당시 내놓은 기대를 모두 충족시켰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이 부회장의 가석방 당시 청와대는 “엄중한 위기 상황 속에서 특히 반도체와 백신 분야에서 역할을 기대하며 가석방을 요구하는 국민들도 많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부회장은 특히 미국 워싱턴 D.C에서 브라이언 디스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과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등을 만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문제 해결을 위한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과 이 부회장의 글로벌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 백악관도 신규 투자 발표 직후 디스 위원장과 설리번 보좌관 명의로 성명을 내고 화답했다. 백악관은 “미국 공급망을 보호하는 것은 조 바이든 대통령과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라며 “삼성이 텍사스에 새 반도체 시설을 건설해 공급망을 보호하고 제조기반을 활성화해 좋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며 삼성전자의 투자를 추켜세웠다.

특히 백악관은 “이번 발표는 삼성이 약속을 지킨 것일 뿐만 아니라 지난 5월 상호보완적 반도체 투자 촉진에 공감대를 형성한 한·미 정상회담 등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라며 강조했다. 이 부회장의 행보가 한미 동맹 관계를 한 단계 올렸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가석방 신분인데도 불구 적극적으로 글로벌 행보를 펴내면서 약속을 지킨 것 같다”면서 “정부가 성탄절 사면 등을 통해 남은 족쇄를 풀어주는 등 이 부회장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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