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선고를 마친 대구지법 서부지원 김정일 부장판사는 고개를 숙인 채 법정에 앉아있는 10대 형제에게 책 두 권을 건넸다. 평소 “게임하지 말라”는 등 잔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키워준 친할머니를 흉기로 무참히 살해한 형제에게 각각 징역형과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한 뒤다.
김 판사가 형제에게 선물은 책은 故 박완서 작가의 ‘자전거 도둑’이었다. 자전거 도둑은 박 작가가 쓴 6개 단편을 모은 소설로, 그 중 자전거 도둑 편은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어른들 속에서 양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를 건네며 재판부는 “앞으로 두 형제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고민해보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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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군은 지난해 8월 30일 대구의 자택에서 친할머니 C(77)씨를 흉기로 60여 차례 찔러 살해했고, 이를 목격한 할아버지까지 살해하려다 동생 B군이 말려 미수에 그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B군은 “할머니의 비명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라”는 A군의 지시에 따라 창문을 닫는 등 형의 범죄를 도운 혐의를 받고 있다.
두 형제는 부모의 이혼 후 지난 2012년부터 신체장애를 가진 조부모와 함께 생활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A군은 재판 과정에서 할머니를 살해한 동기에 대해 “평소 할머니가 ‘게임하지 마라’ ‘급식 카드로 직접 음식을 사먹어라’고 해서 싫었고, ‘20살이 되면 집을 나가라’고 말해 불안했다”고 진술했다.
김 판사는 “피해자가 비록 잔소리를 했지만, 비가 오면 장애가 있는 몸임에도 우산을 들고 피고인을 데리러 가거나 피고인의 음식을 사기 위해 밤늦게 편의점에 간 점 등을 고려하면 죄책이 무겁다”며 불편한 몸으로 두 형제를 돌보기 위해 노력했을 할머니를 언급하며 두 형제를 꾸짖었다.
그러나 김 판사는 ‘우발적 범행’인 점과 ‘교화 가능성’을 강조했다. 김 판사는 판결문에서 “할아버지는 살해하지 않은 점, 평소 부정적 정서에 억눌리던 중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정서표출 양상을 보였다는 심리분석 결과 등을 보면 우발적 범행의 성격이 더 크다”며 “부모 이혼으로 양육자가 계속 바뀌는 등 불우한 성장 환경과 초범인 점 등을 고려해 보면 타고난 반사회성이나 악성이 발현됐다고 보이진 않는다”고 밝혔다.
또 “범행을 인정하며 수차례 반성문을 제출했고 동생은 잘못이 없다고 일관되게 말하는 점 등을 보면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고 있으며 충분히 교화개선 여지도 있어 보인다”고 판시했다.
앞서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A군에게 무기징역을, B군에게는 장기 12년, 단기 6년형을 구형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