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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800여년 불문율 깬 트럼프…“지옥문 열렸다”

김형욱 기자I 2017.12.07 17:16:09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수도" 발언에 전세계 반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지옥 문을 연 결정"
자국 지지층 결집·트럼프 특유 협상 승부수 해석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이스라엘의 수도는 예루살렘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AFP


[이데일리 김형욱 기자] 1192년 9월2일. 예루살렘을 정복하고자 십자군 원정을 온 사자왕 리처드는 예루살렘에서 이슬람의 술탄(지도자) 살라흐 앗 딘(살라딘)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두 영웅은 유대교와 가톨릭교, 이슬람교의 성지가 공존하는 예루살렘을 서로의 영역을 침범치 않고 순례자를 허용하는 평화 지역으로 만들었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분쟁은 이후 800년 동안에도 끊이지 않았으나 ‘서로 허용하는 한 평화롭다’는 불문율이 지켜져 왔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불문율을 깼다. 중동 전체에 전운이 감돈다.

◇트럼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전 세계 반발

트럼프 대통령은 6일(현지시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는 또 주 이스라엘 미 대사관을 이스라엘의 현 수도인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도록 했다. 예루살렘은 3개 종교의 성지이면서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때부터 기존 이슬람 거주민인 팔레스타인 측과 거주 지역을 양분하고 전쟁을 벌여 온 중동의 최대 화약고이다. 미국 역대 정권을 비롯한 전 세계 국가도 양측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대사관을 예루살렘이 아닌 텔아비브에 둬 왔다. 1967년 경계선을 기준으로 양측이 국가를 각각 건설하는 ‘2국가 해법’이란 평화공존 구상을 통해 이를 재차 확인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길게는 800년, 짧게는 70년 가까이 이어진 이 불문율을 깨고 중동의 화약고에 불을 붙인 것이다.

예루살렘 내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인 가자 지구에서 소년들이 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란 발표에 반대하고자 거리로 나선 모습. AFP


이스라엘을 뺀 모든 국제단체와 국가가 일제히 반대의 뜻을 전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인정할 수 없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외무장관도 우려의 뜻을 밝혔다. 안토네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긴급 성명을 내고 “예루살렘의 지위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협상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며 이번 결정을 반대했다. 미국 내에서조차 반대 목소리가 적지 않다.

특히 당사자 격인 팔레스타인 등 아랍권의 반발이 거세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는 “지옥문을 연 결정”이라며 강력 대응을 예고했다. 팔레스타인 측 평화협상 대표 사에브 에레카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무총장도 “트럼프 대통령이 ‘2국가 해법’을 파괴했다”고 성토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진 것은 물론 터키, 요르단 등 주변국 미 대사관 앞에서 시위가 시작됐다. 영국 내 팔레스타인 연대 그룹도 런던 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개최키로 했다.

논란을 자초한 트럼프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종교의 성지라는 의미보다 이스라엘이란 한 국가의 수도라는 데 무게를 두며 진화에 나섰다. 그는 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평화협정 촉진에 도움이 되도록 헌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상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편든 상황에서 양측 협상 중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오히려 미국의 외교적 고립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6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에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표에 반대하는 여성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


◇논란 자초 왜?…자국 지지층 결집·협상 위한 승부수

트럼프 대통령이 우방국의 반대도 무릅쓰고 이번 결정을 내린 이유로는 자국 내 지지층 결집을 꾀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미 대사관 예루살렘 이전은 트럼프 대통령 핵심 공약이기도 했다.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인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은 친이스라엘 행보에 우호적이다. 미 CNN방송은 실제로 “천주교계와 개신교 종파 다수가 우려하고 있는 가운데 복음주의 기독교계는 열렬히 반기고 있다”고 전했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의 맏딸 이방카의 남편이자 백악관 선임고문인 재러드 쿠슈너는 정통 유대교 신자다. 미 뉴스위크지는 이번 결정과 관련한 보도에서 “쿠슈너 고문 같은 유대인 측근이 중동 정책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관심이 쏠린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러시아 스캔들’ 수사 확대란 악재 속에 이달 12일 상원의원 보궐선거를 치러야 한다. 내년 10월 중간선거도 11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협상의 달인’을 자처하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승부수라는 해석도 있다. 팔레스타인을 거칠게 밀어붙인 뒤 양보를 얻어내는 방식으로 오랜 이-팔 교착상태를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대사관 이전을 지시하면서도 당장 옮길 순 없다며 ‘6개월 유예’를 결정했다. 지시는 했지만 이행 여부는 상황에 따라 달리할 수 있다는 여지를 준 것이다. 그러나 영미권 언론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를 자극할 수 있는 위험한 결정이었다며 일제히 비판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주 이스라엘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는 명령서에 서명 후 이를 내보이고 있다. 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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