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고인 측은 “강제추행이 있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받았을 뿐”이라는 입장이지만 피해자 측은 “학교에 이어 병원도 함부로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됐다”며 2차 피해를 우려하고 있다. 방어권은 헌법에 명시된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해 피고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이다.
◇1년 6개월 치 피해자 진료기록 피고인에게 제공
충남 천안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재직했던 A(56)씨는 지난 7월 성폭력범죄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13세 미만 미성년자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지난 2015년 자신이 근무중이던 초등학교에 다니던 B(13)양을 강제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현재 이 사건은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형사합의1부(재판장 원용일)에서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본지 취재 결과 A씨는 지난달 법원에 사실조회촉탁 신청을 통해 B양의 병원 진료기록 자료를 받아갔다. 사실조회촉탁은 재판 당사자(원고·피고인)가 공공기관이나 병원, 학교 등에 필요한 조사나 보관 중인 문서의 사실조회 결과를 부탁해 증거를 수집하는 절차다.
A씨는 지난 2015년 9월부터 지난 2017년 2월까지 1년 반 동안 B양이 다닌 △병원 이름 △병원 주소 △병원 연락처 △병명 등을 법원을 통해 전달받았다. B양의 병원 진료기록 자료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제공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대전지역본부 관계자는 “지난 10월 법원으로부터 제출명령을 받아 자료를 제출한 했다”며 “법원에서 제출명령이 들어오면 공단 입장에서는 자료를 제공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B양의 어머니 손모(45)씨는 자녀의 개인정보가 담긴 진료기록을 성폭력 가해자에 제공한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반발하고 있다.
손씨는 “최소한의 보호 조치 없이 성폭력 피해자의 자료, 그것도 민감한 개인정보인 진료기록 자료를 몽땅 피고인에게 넘겨주는 법이 대체 어딨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B양 측은 A씨에게 제공한 진료기록 자료로 인한 2차 피해를 우려하고 있다. 손씨는 “피고인은 딸이 다니던 학교 교감이었기 때문에 이미 기본적인 개인정보는 다 파악하고 있다”며 “병원 진료기록까지 유출돼 병원에 갈 때도 ‘A씨가 찾아오지는 않을까’하는 불안에 떨고 있다”고 말했다.
A씨 측은 강제추행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받았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A씨 변호인은 “추행과 관련해 병원에서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
사실조회촉탁신청을 통한 자료 제공은 재판 당사자가 방어권을 행사하기 위해 필요한 권리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을 진행하는 재판부가 피해자에 대한 사전 보호 조치 없이 개인정보 제공을 승인한 것은 2차 피해에 대한 법원의 감수성 부족을 드러낸 전형적인 사례라는 지적이 나온다.
장윤미 법무법인 윈앤윈 변호사는 “피고인이 형사재판 절차에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지 유죄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보니 방어권 행사를 위한 절차들이 있다”며 “방어권 행사는 피고인의 정당한 권리 행사이기 때문에 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제도적 문제라기보다 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재판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재판부가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피고인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도 동등하게 보장하고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