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게 자산 처분 권한을 주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분석과 추천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AI는 거래를 제안하고, 이용자가 매번 확인해 최종 승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용자가 자거나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거래가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그에 필요한 실행 권한을 미리 주어야 한다. 이때 중요한 문제는 권한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넘어, 어느 범위까지 허용하고 정해진 범위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다.
하드웨어 지갑 기업 레저(Ledger)의 ‘에이전트 인텐트(Agent Intent)’는 이용자가 거래마다 최종 승인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 AI가 거래를 준비하고 제안하면, 이용자는 별도 하드웨어 기기의 보안 화면에서 내용을 확인한 뒤 기기를 직접 조작해 승인한다. 실제 서명할 거래 내용을 읽기 쉽게 보여 주는 ‘클리어 사이닝(Clear Signing)’을 활용하는 구조다. 레저의 공식 안내에 따르면 현재 베타 단계이며, 거래 준비는 AI가 맡되 최종 승인은 이용자가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방식은 AI의 제안이 곧바로 자산 이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다. 반면 이용자의 승인을 기다려야 하므로, 잠든 동안에도 조건에 따라 거래해 달라는 요구를 그대로 충족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거래마다 직접 승인하는 방식과 일정 범위에서 자동 실행을 허용하는 방식은 구분해야 한다. 필요한 편익이 다르면 부여할 권한과 통제 장치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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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의 구조를 보면 이러한 차이가 더 분명해진다. 코인은 지갑 안에 파일처럼 저장되는 것이 아니다. 자산의 보유와 이전 내역은 블록체인에 기록되고, 지갑은 이를 조회하거나 거래를 준비하고 서명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개인키는 거래에 서명하는 핵심 열쇠이며, 복구문구는 지갑의 개인키들을 복원하는 데 쓰이는 중요한 정보다.
자동 거래를 하려면 AI가 거래를 실행할 수 있는 서명 수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용자의 핵심 개인키나 복구문구를 AI 서비스에 그대로 넘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지원하는 지갑에서는 별도의 거래용 키에 제한된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 직원에게 법인카드를 주면서 사용 한도와 사용처를 정하듯, AI에게도 필요한 범위의 거래만 허용하는 것이다.
개인키를 넘기지 않았더라도 다른 경로로 자산 이전 권한이 넘어갈 수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이더리움 계열의 ERC-20 토큰에서는 특정 스마트 컨트랙트나 주소가 일정 한도 안에서 내 토큰을 대신 출금할 수 있도록 사전 승인(Approve)하는 기능을 제공한다. 열쇠는 내가 보관하고 있지만, 금고 안 특정 코인을 가져갈 수 있는 인출 권한(Allowance)을 따로 열어주는 셈이다. 따라서 개인키를 누가 보관하는지와 함께, 어떤 주소에 어느 정도의 토큰 사용 권한이 열려 있는지도 철저히 확인해야 한다.
이용자가 매번 승인하는 방식에서도 안전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지갑 화면에 복잡한 코드만 표시되거나 설명이 불분명하면 무엇을 허용하는지 모른 채 서명할 수 있다. 이것이 ‘블라인드 사이닝(Blind Signing)’ 문제다. 어떤 코인이 얼마나 이동하는지, 받는 주소는 어디인지, 앞으로 토큰을 가져갈 권한까지 부여하는지를 이용자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AI가 읽는 외부 자료도 위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용자는 코인의 투자 위험을 조사해 달라고 했는데, AI가 웹페이지에 숨겨진 문구를 따라야 할 명령으로 잘못 받아들이는 경우다. 이처럼 자료에 지시를 끼워 넣어 AI의 행동을 바꾸려는 수법을 ‘프롬프트 인젝션(Prompt Injection)’이라고 한다. AI에게 거래 실행 권한이 있다면 외부 자료를 잘못 받아들인 결과가 실제 자산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자동 거래에 일정한 한계를 두기로 했다면, 그 한계는 AI에게 자연어로 당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스템으로 강제해야 한다. ‘하루에 얼마까지’, ‘어느 주소로’, ‘어떤 프로토콜에서’, ‘언제까지’ 허용할지 정하고, 그 범위를 벗어난 거래는 시스템이 물리적으로 차단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모든 거래에 같은 수준의 권한을 줄 필요는 없다. 미리 정한 상대방과의 소액 반복 거래는 정해진 기간과 총액 안에서 자동으로 처리하되, 큰 금액을 보내거나 새로운 상대방에게 자산 사용 권한을 주는 경우에는 이용자가 별도로 승인하도록 할 수 있다. 장기 보관할 자산과 AI가 운용할 자산을 나누고, AI가 사용할 지갑에는 필요한 금액만 넣어 두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다만 지갑을 나누더라도 같은 복구문구를 사용한다면, 그 문구가 노출될 때 여러 지갑의 자산이 함께 위험해질 수 있다.
사고가 발생하면 이용자의 승인 여부뿐 아니라 서비스가 약속한 거래 한도와 보안장치를 제대로 적용했는지도 살펴야 한다. 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 이용자의 지시와 권한 설정, 승인·실행 내역을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책임은 이러한 사실과 적용 법률, 계약 내용, 각 주체의 역할 등을 토대로 판단해야 한다.
AI에게 코인 지갑을 맡기는 문제는 결국 권한을 어떻게 나누느냐의 문제다. 분석만 맡길 수도 있고, 거래마다 직접 승인할 수도 있으며, 일정 범위에서는 자동 실행을 허용할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는 투자 판단부터 매매와 송금까지 포괄적으로 맡기는 방식도 확산될 수 있다.
어느 방식이 적절한지는 이용자의 성향과 목적, 기술에 대한 신뢰, 제도적 보호 수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직접 통제하려는 선택과 폭넓게 위임하려는 선택 모두 가능하다. 다만 어떤 방식을 택하든 그 편리함을 얻기 위해 어떤 권한을 넘기고 어떤 위험을 부담하는지,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은 어떻게 나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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