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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과 CNN방송 등에 따르면 미 정부는 이날 성명을 내고 러시아 및 유럽 국가들과 맺었던 항공자유화조약에서 탈퇴했다고 발표했다. 앞서 지난 5월 트럼프 대통령은 조약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회원국들에게 이를 통보했는데, 탈퇴 효력이 발효하는 6개월이 지나면서 자동으로 회원국 자격을 잃게 된 것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가 조약을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규정을 따를 때까지 우리는 빠지겠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입하지야와 남오세티야 인근에서 비행을 제한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냉전 종식 직후인 1922년 체결된 항공자유화조약은 회원국 간 군사적 신뢰를 높이기 위해 상호 자유롭게 비무장 공중 정찰을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날 탈퇴한 미국 외에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34개국이 가입해 있으며, 그간 미국-유럽 동맹이 러시아의 군사력 확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
유럽 회원국들은 미국에 러시아 군사 동향 정보를 의존해 왔는데, 미국이 이 조약에서 탈퇴하게 됨으로써 관련 정보에 접근할 길이 크게 좁아진 것이다. 러시아의 군사력 확장 우려 때문에 유럽 10개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5월 탈퇴를 예고했을 때 즉각 유감을 표명했다. 유럽연합(EU)도 끊임없이 재고할 것을 요청해 왔다. WSJ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과 러시아 간 긴장이 높아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 정부는 당장은 위성 등으로 수집한 일부 정보를 유럽 국가들에 제공할 방침이다. 그러나 조약에서 완전히 이탈한 만큼 제공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일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미 민주당 밥 메넨데스 상원의원은 이날 성명을 내고 트럼프 행정부의 조약 탈퇴에 대해 “무모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면 조약에 복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WSJ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그간 항공자유화조약에 따라 운영해온 OC-135B 정찰기 3대를 매각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은 “만약 OC-135B 매각이 이뤄지게 되면 바이든 행정부가 조약에 재가입하려고 해도 법적, 예산상 장애물에 직면해 상당한 기간이 걸릴 수 있다”며 “외교 정책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등 차기 정부의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5월 트럼프 대통령의 항공자유화조약 탈퇴 결정을 강력 비판한 바 있다. 그는 당시 성명에서 “이 협정은 강력한 동맹국들의 지지를 받았다”며 “러시아가 규정을 준수했는지와 관련된 문제는 조약의 분쟁 절차를 활용해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아직까지 이 조약에 재가입할 것인지에 대해선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한편 트럼프 행정부의 군축 관련 국제조약 이탈은 이번이 세 번째다. 2019년 이란 핵합의에 이어 지난해 8월엔 러시아와 체결했던 INF조약에서도 탈퇴했다. INF조약 탈퇴 당시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가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1987년 체결된 INF조약은 모든 지상발사형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의 사거리를 550~5500㎞로 제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미국-러시아 간 맺은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New START)’과 더불어 냉전 종식 후 군비 통제를 떠받친 기둥이었다.
뉴스타트 협정은 양국의 실전 배치 핵탄두를 1550기로, 핵미사일 발사대를 800기로 각각 제한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이 협정도 내년 2월 만료되는데, 바이든 당선인이 취임하면 연장 논의가 시작될 것으로 관측된다. 만약 뉴스타트 협정마저 연장되지 않으면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 시대인 1972년 이후 처음으로 법적 구속력이나 검증 가능한 제약을 받지 않는 시대로 회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