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대책 발표에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전세 사기 피해자 구제의 가장 확실한 방안인 ‘피해 주택 공공 매입’과 ‘피해자 우선 매수권 부여’는 입법이 필요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20일부터 시행하는 선순위 채권자의 경매 절차 유예 역시 법적인 근거가 없어 기준이 모호한데다 유예 기간도 정하지 않아 논란의 여지를 떠안고 있다.
|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19일 서울역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전세 사기에 따른 연이은 극단적인 선택에 대해 “너무나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원 장관은 이제야 범정부적인 움직임을 내놓는 것에 대해 “비판을 달게 받겠다”며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가장 가시적인 것은 경·공매 즉시 유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8일 원 장관으로부터 경매 일정의 중단 또는 유예 방안을 보고받은 뒤 이를 시행하도록 했다. 이날 열린 전세 사기 피해지원 범부처 태스크포스(TF)에서는 인천 미추홀구의 전세 사기 피해자로 확인된 2479세대 중 은행권, 상호금융권 등에서 보유 중인 대출분에 대해 이달 20일부터 즉시 경매를 유예하도록 협조를 구할 예정이다. 다만 구체적인 유예 기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원 장관은 “(전세사기 피해자 일부 구제를 위해) 시행령을 고친다든지 긴급입법에 필요한 합당한 기간까지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변협과 심리학회를 통해 100여명 규모의 심리자문단을 구성한다. 기존 전세피해지원센터도 더 적극적으로 나선다.
원 장관은 “피해자로서 국가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야 하지 않느냐”며 “찾아가는 개인별 상담지원을 즉각 가동할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피해자가 절망감, 고립감으로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않도록 모든 조처를 다하려고 한다”며 “올해 고비를 넘겨 앞으로는 약자의 전 재산을 털어먹는 전세 사기가 발을 못 붙이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소송 비용도 지원한다. 원 장관은 “비용 때문에 소송까지는 차마 못 하는 분이 있다”며 “일정 자부담이 필요할 수 있지만 지원을 통해 권리증서나 판결문이라도 갖고 있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국회에서 발의된 ‘선 반환 후 구상권 청구’ 방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원 장관은 “1억원 짜리 전세라면 반환 청구권을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가 3000만원에 사는 것”이라며 “현재 세입자는 3000만원을 받고 세입자 지위를 내놔야 한다”고 언급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전액 반환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원 장관은 “결국 사기범죄에 따른 피해 금액을 다 반환하고 나머지는 국민 세금으로 떠안는 것”이라며 “사회적 합의에 대해 입법, 헌법재판소 동의까지 필요한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우선 매수권 부여에 대해서는 “저희(국토부가) 제안을 해놓은 상태인데, 국회 입법조치가 필요하다”면서 “또 다른 악용을 막기 위해 정밀하게 협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탄에서 대규모 전세 사기로 의심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에 대해서는 미추홀과 성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원 장관은 “문제가 되는 동탄 오피스텔의 경우에는 담보가 전혀없다”며 “대신 원래 가격(예를 들어 1억 2000만원)보다 높은 가격(1억 5000만원)으로 전세금을 내고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역전세로 세입자가 일부 손실을 볼 수 있지만 선순위 채권이 있어 아예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는 미추홀 상황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금융권, 사기 피해자 2차 피해 방지 논의
금융위원회는 이날 전 금융권과 전세 사기 피해자의 거주 주택에 대한 자율적 경매·매각 유예조치(6개월 이상)를 추진한다. 이를 위해 금융감독원은 금융기관의 자율적인 경매·매각 유예가 원활히 이뤄질 수 있도록 각 금융권에 “경매절차를 일정 기간 유예하더라도 제재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비조치의견서를 발급하기로 했다. 이는 경매 유예에 따른 금융기관의 배임 소지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금감원은 국토부로부터 전세 사기 피해 주택의 주소를 입수해 주담대 취급 금융기관에 보내기로 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금융사가 자율적으로 경매·매각 중단에 나서려면 지금껏 전세 사기 피해를 본 다른 피해자 등 형평성 문제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피해 주택의 구체적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며 “이러한 금융권의 요구가 반영됐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은행권도 이날 머리를 맞대고 세부 실행 계획 수립에 돌입했다. 5대 시중은행 여신사후관리 담당 실무진들은 이날 은행연합회에서 전세 사기 피해 임차인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이는 은행 자체적으로 실시한 것으로 앞서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은행연합회·5대 시중은행 임원들과 긴급 화상 대책회의 후 전세 사기 피해자 2차 피해 방지를 위한 세부방안을 논의한 데 이은 후속 실무회의다.
이번 회의에서는 전세 사기 피해자가 거주하는 주택의 선순위 채권자인 은행들이 경매 절차를 유예하는 것과 관련해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논의했다. 다만 금융권에선 경매 유예 조치는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경매를 유예할 법적 근거가 없는 데다 이미 부실채권(NPL) 시장으로 넘어간 전세 물건은 당국의 도덕적 설득이 더 미치지 않아 지속 가능한 대책은 아니다”며 “국회와 정부가 서둘러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