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경 대령(추서 계급 준장)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 초기의 장교이자 제주 4·3 사건 당시 국군의 현지 지휘관으로, 강경 진압 작전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된다.
제주4·3 사건은 미군정기 국가 폭력과 무장 충돌의 역사로 수많은 민간인 희생을 남겼다.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 사건이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한다.
당시 제주지역에는 국군 제9연대가 주둔했는데, 박 대령은 평화적 해결을 주장했던 김익렬 중령의 후임으로 1948년 5월 초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미군정의 신임을 받았던 그는 부임 직후부터 제주 지역 무장대 토벌을 명분으로 한 강경 진압 작전을 지휘했다.
정부의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박 대령은 폭도와 양민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전개했다. 부임 후 약 한 달 사이 수천 명의 제주도민이 체포됐다. 일부 기록과 언론 보도에서는 최대 5000~6000명에 이르렀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확대됐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진상조사보고서와 당시 부하 장교들의 증언에는 그가 “폭동 진압을 위해 제주도민 30만 명이 희생돼도 무방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발언의 정확한 표현과 맥락을 두고는 논쟁이 있지만, 강경한 진압 기조를 상징하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박 대령은 1948년 6월 18일 새벽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친 뒤 숙소에서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사건을 주도한 인물은 당시 정보참모였던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본명 손순호) 하사였다.
이들에 대한 군사재판 기록에 따르면, 범행 사실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개인적 원한이 아닌 ‘부당한 학살 명령에 대한 거부’가 동기였다고 진술했다. 문 중위는 재판 과정에서 박 대령의 무차별 체포와 강경 진압이 오히려 주민들을 무장대로 내몰고 있으며, 더 이상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군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고, 1948년 9월 정부 수립 직후 총살형이 집행됐다.
이후 이들은 오랫동안 ‘상관 살해범’ 또는 ‘하극상 가담자’로 규정됐지만, 4·3 진상 규명이 진행되면서 ‘의로운 군인’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박 대령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일부 보수 진영에서는 그를 국가 수립 초기 혼란 속에서 공산 세력을 진압하고 질서 회복 임무를 수행한 ‘창군 영웅’으로 치켜세운다. 제주 충혼묘지의 추도비와 고향인 경남 남해군에 설치된 동상 등이 이를 반증한다. 지난 9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에서 그는 ‘자유의 투사’로 묘사됐다.
하지만 제주 4·3 유족과 시민사회는 물론 정부의 공식 보고서는 민간인 피해를 확대시킨 강경 진압의 책임자로 규정한다. 박 대령 작전이 무장대 토벌을 넘어 무고한 주민들을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박 대령에 대한 논란은 지난 11일 다시 불거졌다. 국가보훈부가 박 대령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고, 대통령 명의의 국가유공자 증서를 유족에게 수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보훈 당국은 박 대령이 생전 무공훈장을 받은 점 등을 근거로 법적 요건에 따라 심사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제주 4·3 유족단체와 시민사회는 “강경 진압의 상징적 인물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것은 희생자와 역사에 대한 모독”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한편, 국가유공자 지정은 무공훈장 수훈에 따른 것이다. 박 대령은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등급인 태극무공훈장 다음으로 높은 등급의 무공훈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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