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준기 김자영 기자] 주요 20개국(G20)·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정상회의 일정을 마치고 23일 새벽 귀국한 박근혜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YS) 빈소를 찾아 직접 조문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단 하루 만의 조문이었으나, 빈소에 머무른 시간은 단 7분에 불과했다. 1998년 박 대통령의 정계 입문 이후 이어진 두 전·현직 대통령 간 순탄치 않았던 관계가 투영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朴대통령, 차남 현철씨·손여사에 위로의 말 전해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2시께 YS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해 빈소에서 분향하고 영정 앞에 헌화한 뒤 잠시 묵념을 했다. 이어 YS의 차남인 현철씨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했고, 가족실로 이동해 YS의 부인인 손명순 여사의 손을 잡고 애도의 뜻과 추모의 말을 건넸다. 조문 때 박 대통령은 굳은 표정으로 일관했으며, 방명록도 작성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장례집행위원장인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의 안내를 받으며 오후 2시7분께 빈소를 떠났다.
박 대통령의 이날 조문은 지난 2013년 5월 남덕우 전 국무총리와 지난 2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자 사촌언니인 박영옥씨 조문 때와 대비됐다. 당시 박 대통령은 유족들과 10여분간 대화를 나누거나, 고인을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때문에 두 전·현직 대통령의 평탄치 않았던 인연이 다시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YS의 평생 정적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악연이 대(代)를 이은 탓이다.
YS는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추진할 때 “박정희는 독재자”라며 강력한 비판을 쏟아냈다. 이에 박 대통령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업적 면이나 도덕성 면에서나 박 전 대통령이 1등을 차지한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꼴찌로 나타나지 않았느냐”라고 맞받았다. YS는 2007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때 당시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 박 전 대통령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2012년 7월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진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YS에게 “토끼(김문수)가 사자(박근혜)를 잡는 격”이라고 하자, YS는 “(박 대통령은) 사자가 아니다. 아주 칠푼이”라고 원색적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두 전·현직 대통령의 관계는 2012년 대선 직전 YS가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총괄선대본부장을 통해 박 대통령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화해 무드로 발전했으나 완전한 관계복원은 이루지 못했다.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전직 대통령들을 단 한 번도 청와대로 초청하지 않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박 대통령은 26일 열리는 영결식에도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정부는 22일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며, 26일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을 열기로 했다.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했다.
◇이재용·구본무·박용만..재계 총수도 조문행렬 동참
장례 이틀째인 이날 재계 총수들도 대거 조문행렬에 동참했다. 오전에는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및 그룹 사장단을 이끌고 YS의 빈소를 찾았다. 구본무 회장은 “고인은 문민 정치시대를 열어 우리나라 정치와 사회 전반의 발전에 큰 획을 그으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구본준 부회장도 “김 전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은 없고 고향이 가까워 애착이 가는 분”이라며 “중학교 동문이고 내가 국민학생(초등학생)일 때부터 국회의원을 지내셨다”고 했다. 구 회장과 구 부회장의 고향은 각각 경남 진주와 부산으로, YS의 고향인 경남 거제와 맞닿아 있다.
오후 2시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지성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부회장)과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 부회장은 따로 고인에 대한 언급 없이 방명록에 자신의 이름만 적었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겸하고 있는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오후 3시께 빈소를 찾아 “고인은 금융실명제 등 굵은 결정을 많이 하셔서 우리 경제에 도움이 많이 됐다”고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비슷한 시각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현 회장은 외삼촌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독대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