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 기아車 패소…`신의칙` 고무줄 잣대에 기업만 부담

이연호 기자I 2020.08.20 16:34:15

대법원 "기아차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
아시아나 등 승소…`중대 경영상 어려움` 기준 불분명
재계 일제히 우려…"신의칙 적용 구체적 지침 만들자"
한경硏·경총 "기업만 혼란…소모적 논쟁 줄여달라"

[이데일리 박경훈·이연호 기자] 기아자동차 노조가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1조 원대 통상임금 소송에서 사실상 최종 승소했다. 앞서 아시아나항공 등의 통상임금 소송에서는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인정하며 사측 손을 들어줬던 대법원이 이번에는 이 원칙을 수용하지 않으며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경영 불확실성으로 인한 기업의 부담을 가중시킬 전망이다.

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 노조원들이 20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기아차를 상대로 낸 임금 소송에 대한 상고심 선고 승소 기자회견을 마친 뒤 기뻐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 9년 만에 마무리…“상여금 통상임금에 해당”

대법원 1부는 20일 기아자동차 노조 소속 3000여 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를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이자 포함 1조 원대 규모의 이 소송이 제기된 지 9년 만에 판결을 확정하며 ‘신의칙’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통상임금 여부는 그 임금이 소정근로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금품으로서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되는 것인지를 기준으로 객관적인 성질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며 “이 사건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앞서 이 사건은 지난 2011년 기아차 근로자들이 “정기상여금과 일비·중식대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연장·야간·휴일근로수당 및 연차휴가수당 등을 정해야 한다”며 시작됐다. 이들이 청구한 임금 미지급분은 원금 6588억원에 이자 4338억원이 붙은 총 1조 926억원이다.

1심에서는 정기상여금과 중식비를 통상임금으로 인정하고 일비는 인정하지 않으며 기아차가 약 4223억원(원금 3126억원, 지연이자 1097억원)을 근로자들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2심에서는 일부 수당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해 1억 원이 줄어든 4222억 원을 기아차가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이후 기아차는 노조와 상여금의 통상임금 적용 및 미지급금 지급 방안을 합의해 근로자 1인당 평균 1900만 원을 지급했다. 대부분의 근로자가 소송을 취하했으나 노조원 약 3000 명은 소송을 계속했다. 이번 판결로 기아차가 추가로 지급해야 할 임금은 이자 포함 약 500억 원으로 알려졌다.

◇대법원, ‘신의칙’ 불인정…재계 “기업 경영 불확실성 커져” 우려

이 사건의 주요 쟁점은 재판부의 ‘신의칙’ 인정 여부였다. ‘신의칙’은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해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 또는 방법으로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해서는 안 된다는 민법상의 원칙이다. 사측은 “소송에서 패할 경우 회사가 막대한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경영에 무리가 온다”며 ‘신의칙’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사건 청구로 인해 피고에게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되거나 기업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날 판결은 앞서 법원이 아시아나항공·한국GM·쌍용차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을 인정해 사측의 손을 들어준 것과는 상반되는 결과다. 각각의 사건에서 재판부는 “피고는 여전히 상당한 채무를 부담하고 있는 점”(아시아나항공), “법정수당을 추가로 지급하라는 것은 노사가 합의한 임금 수준을 훨씬 초과하는 것”(한국GM), “재정적 지출을 하게 돼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에 빠지게 될 것”(쌍용차) 이라며 사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계는 이날 판결에 대해 일제히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추광호 경제정책실장은 이날 판결 후 논평을 내고 “이번 통상임금 판결로 예측치 못한 인건비 부담이 급증해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이 높아질 것으로 우려된다”며 “신의칙을 적용할 수 있는 기업 경영의 어려움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 기준이 제시되지 않아 산업계 혼란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조속히 신의칙 적용과 관련한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해 소모적인 논쟁을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경총은 “이날 판결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면서 신의칙에 따른 예외 적용을 인정하지 않아 기존 노사간 합의한 임금체계를 성실하게 준수한 기업에게 일방적으로 막대한 규모의 추가적인 시간외수당을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서 경영계는 심히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이어 “많은 통상임금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법원에서도 이 문제를 현실과 국제 경쟁 환경에서의 경영전략을 고려해 재심의를 할 필요성이 있고 향후 통상임금 소송에서도 이런 점들을 충분히 고려해 판단해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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