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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명예회장은 전쟁 당시 통신병으로 비밀훈련을 받고 암호를 취급하는 부서에 배치된 후 해군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까지 북진하는 작전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조용한 성품 때문에 이 같은 공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뒤늦은 2014년 5월이 돼서야 6.25전쟁 참전용사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 받았다.
재계 안팎에서는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큰 어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사업적 결단의 순간 때도 고인은 실무진의 의견을 다 듣고 나서야 입을 열어 방향을 정했던 것으로 안다. 한 번 일을 맡기면 상대방을 신뢰하고 오래도록 지켜보는 ‘믿음의 경영’을 실천했다”며 “고인에 대해 두산 직원들은 사람의 진심을 믿고, 존중하던 ‘침묵의 거인’, 주변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큰 어른’이라고 말한다”고 전했다.
◇‘남의 밥 먹는 것’부터 시작…두산서 첫 업무는 공장 청소
군을 전역한 그는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귀국해 1960년 한국산업은행 공채 6기로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첫 시작을 두산이 아닌 산업은행을 택한 데에는 선친 박두병 그룹 초대회장이 있었다. “남의 밑에 가서 남의 밥을 먹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 것이요, 장차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것이다”는 선친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3년 동안 은행 생활을 한 박 명예회장은 1963년 4월 마침내 동양맥주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했다. 첫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였다. 이후 선진적인 경영을 잇따라 도입하며 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했고 한양식품,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쳐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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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그룹 회장 재임 당시 그는 ‘글로벌 두산’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다. 1985년에는 동아출판사와 백화양조, 베리나인 등의 회사를 인수하며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90년대에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두산창업투자, 두산기술원, 두산렌탈, 두산정보통신 등의 회사를 잇따라 설립했다.
국내 기업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등 선진적인 경영을 적극 도입했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다. 1996년에는 토요 격주휴무 제도를 시작했으며, 여름휴가와 별도의 리프레시 휴가를 실시하기도 했다. 두산그룹 출신 한 원로 경영인은 “바꾸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새로운 경영기법이나 제도가 등장하면 남들보다 먼저 해보자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그는 부단히 혁신을 시도한 리더이기도 했다. 창업 100주년을 한 해 앞둔 1995년의 혁신이 대표적이다. 경영위기 타개를 위해 당시 주력이던 식음료 비중을 낮추면서 유사업종을 통폐합하는 조치를 단행, 33개에 이르던 계열사 수를 20개 사로 재편했다. 이어 당시 두산의 대표사업이었던 OB맥주 매각을 추진하는 등 획기적인 체질 개선작업을 주도해 나갔다. 이 같은 선제적인 조치에 힘입어 두산은 2000년대 한국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미국 밥캣 등을 인수하면서 소비재 기업을 넘어 산업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박 명예회장은 새로운 시도와 부단한 혁신을 통해 두산의 100년 전통을 이어갔고, 더 나아가 두산의 새로운 100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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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명예회장은 어려서부터 선친에게서 “늘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 “내가 먼저 양보하면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얘기다. 주위 인물들에 따르면 그는 또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품었으며, ‘수분가화(守分家和)’를 가훈으로 삼았다. 형제와 자녀들에게 ‘수분가화’라는 붓글씨가 적힌 액자를 선물하곤 했다. ‘수분가화’는 ‘자신의 분수를 지켜야 가정이 화목하다’는 뜻으로, 더 나아가면 ‘능력 범위 안에서 행동하라’ ‘조금씩 양보하고 참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가정에서의 모습에 대해 유족들은 “아내에 대해 평생 각별한 사랑을 쏟은 남자”로 기억한다. 부인 고(故) 이응숙 여사와는 1960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 여사는 박 명예회장에게 있어 인생의 동반자이자 조언자였다. 하지만 이 여사는 1996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박 명예회장은 암 투병 중이던 부인의 병실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오랜 기간 간병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일찍 떠나 보낸 아내를 한결 같이 그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23년 간의 ‘사부곡((思婦曲)을 써내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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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명예회장은 인화를 강조했다. 고인은 평소 “인화로 뭉쳐 개개인의 능력을 집약할 때 자기실현의 발판이 마련되고, 여기에서 기업 성장의 원동력이 나온다”고 말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인화란 공평이 전제되어야 하고, 공평이란 획일적 대우가 아닌 능력과 업적에 따라 신상필벌이 행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사원이 일생을 걸어도 후회 없는 직장이 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가졌던 고인은 “인재가 두산의 미래를 만드는 힘이다”고 항상 강조했다. 그의 생전 발언들을 보면 사람에 대한 생각이 잘 담겨있다. “두산의 간판은 두산인들입니다. 나야 두산에 잠시 머물다 갈 사람이지만 두산인은 영원합니다”, “나는 무엇보다 사람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잘나고 못나면 얼마나 차이가 있겠습니까. 노력하는 사람, 그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합니다”, “기업은 바로 사람이고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며 인재를 강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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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약력
박용곤(朴容昆)
△1932년 서울 생
△경동고등학교 졸, 미국 워싱턴 대 경영대학 졸업(1959) 충남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82), 연세대학교 명예법학 박사(1995)
△1960년 한국산업은행 입행
△1963년 동양맥주㈜ 입사
△1966년 한양식품㈜ 대표이사 사장
△1973년 동양맥주㈜ 대표이사 부사장
△1974년 두산산업 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1974년 합동통신사 대표이사 사장
△1974년 한국신문협회 이사
△1978년 두산산업㈜ 대표이사 회장
△1978년 주한 볼리비아 명예영사
△1981년 두산그룹 회장
△1981년 한국능률협회 부회장
△1981년 국제상업회의소(ICC-KNC) 의장
△1982년 프로야구단 ‘OB BEARS’ 구단주
△1983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1985년 주한 Ireland 명예영사
△1996년 두산그룹 명예회장
△1998년 두산건설㈜ 대표이사 회장
△2008년 학교법인 중앙대학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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