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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에 담긴 황진이의 시조… 선화랑, 세바스티안 에스페호 한국 첫 개인전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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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경 기자I 2026.05.14 09:16:13

동양적 정서와 서양 회화가 만난 전시 ‘Bright Moon’
황진이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에서 출발한 작품 소개
에스페호 “친밀감은 공유된 기억과 연결되는 순간”
선화랑서 6월 12일까지 전시 진행

The moon and the river, 100x80cm, oil and wax on calico, 2024-26. 선화랑 전시 ‘Bright Moon’의 대표작으로, 전경에는 창백하고 차가운 빛 속 정물이 놓여 있고, 배경에는 달빛을 따라 고요한 강 위를 나아가는 어부가 그려져 있다. 황진이의 시조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작품이다.(사진=선화랑)
[이데일리 신문경 기자] 구상과 추상 사이를 오가는 유화 위 동양적인 풍경이 스며들었다.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칠레 작가 세바스티안 에스페호(Sebastián Espejo)의 작품은 조도를 낮춘 어두운 전시장 안에서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선화랑에서 열린 에스페호의 개인전 ‘Bright Moon’은 2026년 프리즈 뉴욕(Frieze New York)을 비롯해 영국과 튀니지의 셀마 페리아니 갤러리로 이어지는 전시 일정 사이에서 열린 한국 첫 개인전이다. 2025년 선화랑의 그룹전 ‘The Way We Live Now’ 이후 다시 한 번 한국에서 작품을 소개하게 된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전경과 후경, 물질과 관념이 교차하는 창조적 예술 세계를 보다 선명하게 보여줬다.

전시장에는 신작 18점이 놓였다. 묘사적 사실주의(Descriptive Realism) 전통을 기반으로 정물과 풍경을 그려온 에스페호는 이번 전시의 출발점으로 황진이의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를 택했다. 황진이의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에는 계곡과 땅, 영원한 자연과 유한한 인생의 대비가 드러난다. 팟캐스트에서 우연히 이 시조를 접한 에스페호는 이러한 이중성이 자신의 회화와 맞닿아 있어 작품에 시조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1층에는 황진이의 시조를 바탕으로 완성한 작품을, 2층에는 영국과 프랑스, 일본의 풍경을 담은 작업이 전시됐다. 작품 사이에는 넉넉한 여백을 두었고, 공간의 조명을 덜어 달빛 아래 머무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전경과 후경의 대비로 구성된다. 화면 앞쪽에는 손에 잡히는 일상 사물을 배치하고, 배경에는 풍경이나 하늘을 놓는다. 전경은 물질의 세계이고, 배경은 상상과 해석의 영역이 된다. 에스페호는 “내 회화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하나는 손에 잡히는 물질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형상을 읽고 의미를 해석하는 관념 세계다. 물질의 세계는 땅처럼 가까이 있지만, 관념 세계는 달처럼 닿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 두 층위 사이의 이동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는 형태를 완결하지 않는다. 유리 화병의 경계를 흐리게 두거나, 배 위 인물의 윤곽만 남겨두는 식이다. 화면 속 풍경은 현실의 장면처럼 보이면서도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다. 흐릿한 경계와 미완의 형상은 관람자의 상상 안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January, 50x40cm, oil, pencils and wax on wood, 2025-26. 겨울의 풍경을 표현한 작품이다. 반원형 아치 안에는 겨울의 별자리인 '물병자리'와 '염소자리'가 등장한다.(사진=선화랑)
선화랑 전시 'Bright Moon'의 2층 전시 전경.(사진=신문경 기자)
에스페호는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1~2년의 시간을 들인다. 의미의 층위를 여러 겹 쌓아 올리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작가의 회화는 유동적이다. 하나의 의미나 정체성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변화하는 자연 풍경 앞에는 자신이 실제 소장한 사물들을 배치하고, 배경에는 세잔과 고갱 등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미지에서 차용한 인물을 더하기도 한다. 문학 역시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다. 신작의 일부 작업은 황진이의 시조를 접하기 전부터 시작했고, 이후 인물과 물의 형상을 덧입히며 새로운 방향으로 완성해 나갔다. 그는 작품을 ‘함께 살아가는 오브제’이자 ‘자식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그림이 무언가를 원하면 그것을 들어준다”라는 그의 말처럼, 작업은 처음 구상대로 고정되기보다 시간 속에서 조금씩 형태를 바꿔 간다.

신작 'Bright Moon'을 설명하고 있는 세바스티안 에스페호 작가. 작품에 드러나는 수평과 수직의 구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사진=신문경 기자)
에스페호는 선화랑에서의 전시에 대해 “선물 같은 경험”이라고 말하며,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 문화권이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 면에서 닮아 있다고 느꼈다”라고 전했다. 인생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에 여백을 남겨두고 받아들이는 감각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관람객이 전시에서 ‘친밀감(Intimacy)’을 느끼길 바란다고 했다. “친밀감은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감각이다. 연인 사이의 친밀함도 있고, 지하철에서 어떤 작품을 마주쳤을 때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르며 느껴지는 친밀감도 있다. 내가 사용하는 명화의 레퍼런스들 역시 오랫동안 우리의 상상 속에 존재해 온 이미지들이다.” 공유된 기억과 연결되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문화를 넘어 나눌 수 있다는 믿음이 에스페호의 회화를 관통한다.

원혜경 선화랑 대표는 “에스페호는 자신만의 시선과 태도가 분명한 작가”라고 소개하며 “젊고 재능 있는 작가를 한국에 알리게 되어 기쁘다” 고 말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위에서 출발한 회화는 전시장 안에서 동서양의 시선이 융합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감각으로 이어진다. 전시는 6월 12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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