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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법 형사12부(재판장 홍동기)는 1일 오후 2시30분 비서 김지은씨를 업무상 위력을 통해 간음·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 전 지사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을 연다.
위력(威力)이란 사람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형적·무형적인 힘을 말한다. 여기에는 폭행·협박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정치적 지위 등도 포함된다. 안 전 지사의 경우 업무상 하급자로서 수행비서인 김씨에게 정치적·사회적 위상과 도지사로서의 지위 등 위력을 행사해 김씨 의사에 반해 성관계 등을 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위력, ‘존재’하나 ‘행사’하지 않아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에게 위력이 있었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고인(안 전 지사)이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명되고 있는 지위 및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의 임면 등 권한을 가지고 있다”며 “이는 위력에 의한 간음, 추행죄에서 위력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피고인이 위력을 행사해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한 후 간음 및 추행행위를 저질렀다고 볼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위력은 존재했지만 행사하지 않았다’는 논리로, 위력의 존재와 행사는 구별해야 한다고 판단한 셈이다.
1심 재판부는 이와 관련 “처벌 규정상 위력 관계 즉, 권력적 상하관계에 놓여 있는 남녀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며 △상대방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정도의 위력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위력이 행사돼야 하고 △행사된 위력과 간음, 추행 행위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돼야 하며 △그로 인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결과가 발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두고 여성계 등을 중심으로 “위력의 존재와 행사의 구분이 자의적이며 위력의 범위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했다”며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피해자 중심 사건 이해…‘성인지 감수성’ 주목
항소심 역시 위력의 행사 여부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 지가 유무죄를 가르는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법조계에선 최근 대법원이 성폭행 사건에 대해 제시한 ‘성인지 감수성’을 주목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생활 속에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내는 감수성을 말한다.
대법원은 지난해 4월 학생을 성희롱 해 징계를 받은 대학교수가 낸 해임 결정 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파기환송하면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당시 재판부는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조계는 이를 가해자 중심이 아닌 피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이해하고 바라보며 범행 전후 피해자의 행동 등 단편적인 상황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성희롱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해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안 전 지사 1심 재판부도 ‘성인지 감수성’을 적용했지만 혐의 인정에는 이르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일견 피해자가 신빙성이 떨어지는 진술이나 태도를 보이는 것이 성폭력 피해나 2차 피해로 인한 충격에 의한 것인지 여부를 고민했다”고 밝혔다.
△피고인이 성적 길들이기를 해 ‘그루밍’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무기력해지고 현실 순응적이 되는 ‘학습된 무기력 상태’와 같은 심리상태에 빠진 것은 아닌지 △‘해리’나 ‘긴장성부동화’ 또는 ‘심리적 얼어붙음’ 현상을 겪은 것은 아닌지 △부인과 억압의 방어기제를 통해 견뎌온 것은 아닌지 등을 살펴봤다고 설명했다.
1심 재판부는 그러나 “제반 증거와 사실관계에 기초해 평가할 때 피해자가 이러한 상태에 빠져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