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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송승현 기자] 공식적으로는 1987년 이후 32년 만, 5·18 민주화 운동 발생 39년 만의 광주 방문….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하는 시간이 흘렀지만 사과의 말 한마디나 반성의 기미는 없었다. 대신 “5·18 당시 발포 명령을 했느냐”는 취재진의 물음에 “이거 왜 이래”라며 역정을 냈다.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두환(88)씨는 5·18 관련 23년 만에 피고인으로 다시 서게 된 법정에서도 ‘반성’과 ‘참회’ 없이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허위 사실’만 처벌하는 사자명예훼손…관건은 ‘헬기 사격’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를 모독한 혐의인 사자명예훼손죄는 허위 사실을 적시해 사자(死者)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다. 생존 인물에 대한 명예를 훼손했을 경우 적용되는 일반 명예훼손과는 구분된다.
우선 형량에 차이가 있다. 사자명예훼손죄의 경우 법정 최고형은 징역 2년이다. 법정 최고형이 징역 5년인 일반 명예훼손과 달리 형이 낮은 편이다. 또 사자명예훼손은 피해 유족의 고소가 있어야만 기소가 가능한 친고죄다.
범죄 혐의의 증명은 일반 명예훼손보다 더 까다로운 편이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사회적 평가를 저해하기만 해도 처벌 받는 일반 명예훼손과 달리 사자명예훼손은 ‘허위 사실’에 대해서만 처벌한다.
전씨는 지난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故) 조비오 신부의 증언을 거짓이라 주장하며 조 신부를 “사탄, 파렴치한 거짓말쟁이” 등이라 비난해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다.
전씨 혐의의 유무죄를 가리는 쟁점은 헬기 사격 여부가 실제 있었는지 여부다. 법원이 5·18 유혈 진압 당시 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판단하면, 전씨는 처벌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노무현 차명계좌’ 조현오 실형 불구 사자명예훼손 실형 드물어
헬기 사격 여부가 사실로 인정돼 유죄를 선고 받는다고 해도 실형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나온다. 사자명예훼손죄는 실형 선고가 극히 드문 편이다. 대법원에 따르면 2013~2017년 사자명예훼손 혐의 피고인(단일범 기준) 중 1심에서 실형을 받은 사례는 없다.
같은 기간 징역형 집행유예를 받은 사례는 한 차례 있었다. 2013년 1월 서울중앙지법 형사15단독 신현일 판사는 “김대중이 김일성과 짜고 북한 특수군을 광주로 보냈다”는 등 허위 사실을 온라인 게시판에 적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보수논객 지만원(77)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지씨의 학력·경력·사회적 지위 등에 비춰볼 때 미필적으로나마 허위 사실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반 명예훼손과 병합된 탓에 실형이 선고된 경우는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으로 고 노 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명예훼손)로 2014년 3월 징역 8월의 확정 판결을 받은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 대표적이다. 당시 대법원 3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전해 들은 이야기의 진위를 다른 경로로 확인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음에도 달리 이를 확인한 바 없다”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서는 죄질과는 무관하게 사자명예훼손으로 기소된 만큼 실형 가능성은 낮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사자명예훼손의 보호법익은 유족이라 당사자가 보호법익이 되는 일반 명예훼손과 달리 형이 약한 편”이라며 “또 명예훼손죄 자체에 대해 처벌이 온당하냐는 문제제기도 있는 만큼 실형이 나오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광주지법 형사8단독 장동혁 부장판사는 다음달 8일 오후 2시 검찰 측 증거목록 누락을 이유로 공판준비기일을 한 차례 더 열기로 했다. 준비기일에는 피고인의 출석 의무가 없어 다음 재판에는 전씨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