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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부터 닉슨까지…세계 정치 뒤흔든 스포츠 이벤트는?

방성훈 기자I 2018.02.05 15:44:18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오는 9일 개막을 앞둔 평창 동계올림픽이 세계 정치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예정이다. 지난 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지속된 미-북 갈등을 일시적으로나마 봉합시킨 스포츠 이벤트로 기록될 것으로 보여서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평창 올림픽 참가 결정 이후 전 세계 언론에서 그 어떤 올림픽 출전 선수보다 많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불신, 그리고 이에 따른 각종 제재 등 강경·압박 대북정책 기조를 지속하고 있다. 아울러 한반도 정세가 평창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지금처럼 평화롭다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올림픽 개막식 남-북 선수단 동반 입장,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등 잠시나마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고 대화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올림픽이 정치에 이용된 사례는 적지 않다. 평창 올림픽처럼 과거 세계 정치를 뒤흔들었던 스포츠 이벤트들을 블룸버그가 5일 살펴봤다. 영국 브라이튼 대학의 우도 메르켈은 “스포츠를 외교 정책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광범위한 외교 정책이나 전략에 깊숙하게 관련돼 있는 경우에만 효과가 있다”면서 “전략적으로 관련이 없거나, 상징적인 제스처이거나, 국제적 이벤트에 그친다면,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홀로 400m 결승전을 치른 영국의 윈드햄 핼스웰 선수. /올림픽조직위원회 홈페이지 캡쳐.
◇1908년 런던 올림픽

1908년 런던 올림픽 때 미국과 영국은 심한 갈등을 겪었다. 급속도로 국력을 키운 미국은 이미 세계적으로 높은 위상을 뽐내던 영국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영국은 개회식에 미국 국기를 내걸지 않았고, 이에 반발할 미 선수단은 개회식에서 영국 왕 앞을 지나면서 성조기 낮춰들기를 거부했다. 흥분한 영국 관중은 야유를 퍼부었고, 대회가 끝날 때까지 양국 간 대부분의 경기는 난장판이 됐다.

특히 육상 400m 경기 결승에서 미국 선수 3명과 영국 선수 1명이 출전했는데, 미국 선수 중 1명이 영국 선수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진로방해를 하며 팀플레이를 했다. 당시 미국에선 허용됐으나 영국에선 금지된 규정이었다. 이에 영국인 심판은 미국 선수에 반칙을 선언했고 경기는 무효처리됐다. 판정에 불복한 미국 선수들은 재경기에 불참, 영국 선수 혼자 결승전을 치르는 전대미문의 경기가 됐다.

런던 올림픽은 마라톤 코스 길이를 42.195km로 확정시킨 대회기도 하다. 당초 마라톤 코스는 42km였으나, 올림픽조직위원회는 알렉산드라 여왕이 골인 장면을 지켜볼 수 있도록 골인 지점을 세퍼드부시 스타디움 내 로열박스 앞으로 195m 늘렸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당시 독일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에겐 오욕의 역사로 남았다. 올림픽 개최지로 베를린이 선정된 이후 히틀러가 유대인과 유색 인종이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도록 힘쓰고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다. 이후 불참하겠다는 나라가 늘어났고, 독일은 다급하게 평등한 올림픽을 약속했다.

하지만 말 뿐인 결과가 됐다. 히틀러가 금메달 4관왕에 오른 미국 흑인 육상선수 제시 오언스와의 악수를 피했기 때문이다. 우승자 및 올림픽 영웅과의 악수는 관례였으나 열등한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한 것이다. 올림픽 개최를 통해 평화와 관용을 강조하려던 히틀러의 계획도 차질을 빚게 됐다.

◇1971년 미-중 ‘핑퐁 외교’

1971년 4월 10일 미국 탁구 선수단 15명이 중국 베이징에 첫 발을 내딛었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수개월 간 비밀 회담을 가지면서 외교 관계를 구축한 결과였다.

전 세계가 주목했다.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을 공식 방문한 최초의 미국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핑퐁’ 외교다. 미국 선수단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지에서 일주일 동안 중국 선수들과 친선 경기를 치렀다.

이후 미국도 중국 탁구 선수들을 초대해 친선 대회를 열었고, 우호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이듬 해인 1972년 닉슨 대통령은 미 대통령 중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게 되며, 이는 1979년 미-중 수교를 위한 첫 발걸음이 된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 2명을 사살하고 9명을 인질로 삼았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모습. /올림픽조직위원회 홈페이지 캡쳐.
◇1972년 뮌헨 올림픽

1972년 뮌헨 올림픽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이후 독일에서 열린 첫 올림픽이었다. 올림픽조직위원회는 분단된 동독과 서독 간 화해 무드가 조성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동독은 자국 팀만을 응원했으며 서독에서 생산된 맥주조차 거부했다.

특히 올림픽 기간에 테러가 발생, 피로 얼룩진 올림픽이 됐다.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은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로 숨어 들어가 역도 선수와 레슬링 코치를 총으로 쏴 죽였다. 이후 남은 9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인질로 삼고, 팔레스타인 죄수 230여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하지만 독일 경찰은 테러 진압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나머지 9명마저 전원 살해됐다. 홀로코스트 상처가 있는 독일 한복판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 정치적 충돌이 발생해 올림픽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독일 외 냉전을 대표하는 국가는 남·북한이었다. 이 때문에 1988년 서울에서의 올림픽 개최는 의미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올림픽이 열리기 한 해 전, 북한은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테러를 단행했다. 115명이 죽는 대참사였다. 북한은 이후 공동개최를 주장하며 방해공작을 벌이다 끝내 불참했다.

역대 올림픽 중 가장 위험한 분위기 속에서 개막했지만 가장 높은 참여율로 서울 올림픽은 전반적으로 성공을 거뒀다고 블룸버그는 평가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북한이 굴욕을 당한 뒤 군사적인 도전으로 입장을 전환, 한반도 긴장감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역사학자 세르게이 라트첸코는 분석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모습. /올림픽조직위원회 홈페이지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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