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일인 29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 주민센터에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투표소를 바라보는 발달장애인 7명이 모였다. 오전 11시 30분쯤 여느 직장인처럼 사전투표소를 방문한 이들은 모두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혼자서는 투표용지에 정확히 기표할 수 없어 보조인의 동행을 요구했지만 거절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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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를 가진 박연지(33)씨는 이날 오전 평소 그를 도와온 보조인과 사직동 사전투표소를 방문했다. 박씨가 선거관리인에게 “손이 떨려서 투표보조를 받고 싶다”고 말하자 선거관리인은 박씨에게 기표용구시험용지에 도장을 찍어보라고 안내했다. 박씨가 찍은 기표용구는 동그라미의 일부만 점처럼 표시됐다. 이를 본 선거관리인은 “기표행위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시각이나 신체장애로 손 떨림이 심해서 기표가 어려운 상황이 아니면 투표보조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박씨는 “손에 힘이 없어서 도움이 필요하다”, “무슨 말인지 다시 설명해달라”고 20분 넘게 항의했지만 투표보조를 받지 못했다.
이날 박씨와 함께 투표소를 찾은 노호성씨는 “이 상황을 말로만 듣다가 직접 보니까 너무 속상하고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것을 느낀다”며 “왜 이렇게 하나 싶고 어안이 벙벙하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또 다른 여성 발달장애인은 투표보조가 거부된 뒤 두 손으로 얼굴을 훔치며 오열했다.
이날 선거관리인이 제시한 기표용구시험지는 기표용구의 잉크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공한 용지였다. 선관위 계자는 “대법원 판례에서 신체상으로 기표에 어려움이 있는지 확인을 거쳐서 투표보조를 할 수 있다고 돼 있다”며 “매뉴얼에 모든 상황에 대한 내용을 넣을 수는 없으니까 투표관리관이 대법원 판례에 따라 이 부분을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승헌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추련) 사무국장은 “현장의 직원들이 임의로 투표보조를 위한 신체능력을 시험한 것인데 실제 투표용지와 규격이 다르지 않느냐”고 되물으면서 “선관위가 애초에 정한 기준에 따라 정말 소근육 사용능력을 확인하려고 한 것이라면 투표지와 동일한 규격으로 사전에 안내된 지침에 따라 판단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 모든 과정이 임의로 이뤄져서 부적절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런 임의의 시험이 또 다른 차별기준을 낳았고, 이 일로 장애인은 또 차별을 당했다”고 덧붙였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시각 또는 신체 장애로 인해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이나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해 투표를 보조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발달장애인들은 어디까지를 시각·신체장애로 볼 수 있는지, 투표 보조를 어떤 기준으로 허용할지 그 기준이 불명확해서 도움을 받아야 할 장애인이 적절한 지원을 못 받는 일이 잇따른다고 지적한다.
지난 1월 부산고법 민사 2-2부(최희영 부장판사)는 발달장애인 3명이 투표보조를 발달장애인에게도 지원해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차별구제 등 청구 사건에 대해 원고 일부 승소를 판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발달장애인들이 혼자 기표할 수 없는 경우 투표보조를 허용할 경우 비밀이 노출될 우려가 있다고 하더라도 발달장애인들의 선거권 행사를 충실히 보장하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고, 비밀보장과 공정성 유지를 위해 ‘지명한 2인’을 동반하도록 하고 있어 투표보조인에 의한 발달장애인 의사 왜곡 가능성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선관위는 공직선거법 개정이 우선돼야 한다며 대법원에 해당 사건을 상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