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림박물관 ''공명:자연이 주는 울림''
자연 주제로 전통과 현대 미술작품 한곳에
"자연으로 회귀해 하나되고자 한 정신 돗보여"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불린 겸재 정선(1676~1759)은 1719년 44세의 나이에 중국화보를 보면서 이를 한국식 화풍으로 재해색한 ‘사계산수도 화첩’을 그렸다. 네 개의 화폭에는 사계절을 배경으로 빼어난 한국의 산수와 절벽, 누각, 집이 그려져 있다. 특히 봄의 경치를 담은 ‘호림한거’에는 은거해서 살고 싶은 이상향의 세계까지 담고 있다. 예부터 자연은 예술가들의 작품 창작에 많은 영감을 줬다. 사람들은 산수 그림을 보며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거기에 머물고, 자연에 귀의하는 ‘물아일체’의 경지까지 체험하고자 했다.
| 정선 ‘사계산수화첩’(사진=호림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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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연의 영감은 고미술뿐 아니라 현대 미술로 넘어오면서도 이어졌다. 수화 김환기(1913~1974), 김창열(1929~2021), 정상화(90), 이강소(79)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가들의 회화 작품이 대표적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중요시했던 이들 작가들은 점, 방울, 색, 기호 등 각자의 고유한 시각 언어를 통해 자연을 표현하고자 했다. 김환기의 작품에 단순화 된 점, 전, 면은 한국의 자연과 별 등 자연 현상을 축약적으로 나타낸다. 정상화의 푸른 청색 그림은 작가가 그리워한 고향 마산 바다를 담고 있기도 하다.
과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연이 미술 작품에서 어떻게 표현됐는지 한데 모아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있다. 성보문화재단 호림박물관이 오는 16일부터 6월 12일까지 서울 강남구 호림박물관 신사 분관에서 개최하는 ‘공명:자연이 주는 울림’에서다. 올해 호림박물관이 선보이는 첫 기획전시로 총 7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를 하루 앞두고 기자 간담회를 통해 전시를 먼저 엿볼 수 있었다.
이번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고미술품을 다수 소장하기로 유명한 호림박물관에서 고미술품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의 거장들의 작품도 대거 등장한다는 점이다. 김환기를 시작으로 김창열, 정상화, 이강소, 박서보(91), 윤형근(1928~2007), 이우환(86) 등이 그 주인공이다. 오혜윤 호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 작가들은 있는 그대로를 긍정한 무작위적 행위를 통해 물아일체의 궁극적 세계를 체득하고 자연으로 회귀해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담은 작품뿐만 아니라 자연의 정신을 닮고자 한 모습도 과거와 현대 모두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대표적 그림 주제였던 사군자가 그렇다. 사군자는 군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매화·난초·국화·대나무 네 가지 식물에 대입해 시각과한 그림이다. 전시 2부 ‘자연을 품다’에서는 과거부터 즐겨그린 사군자 정신이 어떻게 현대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는지 윤형근, 박서보의 작품과 김홍도의 매조도, 최굽의 사군자 화첩 등의 작품을 통해 흥미롭게 풀어냈다.
| 정상화, Untitled 96-12-5, 1996년(사진=호림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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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박서보의 묘법과 분청사기는 한 공간에서 대조했다. 박서보의 묘법 중에서도 초기 작품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회흑색의 도자기인 분청사기를 사뭇 닮아있다. 박서보는 캔버스에 유화무람을 칠하고 연필과 철필로 선을 그어 붙이고 밀어내고 긁고 바르는 단조로운 행위를 연속해서 작품을 표현했다. 오 학예연구사는 “연필로 수백번씩 선을 긋는 과정이 과거 선비들이 정신수양을 하며 여러차례 선을 긋고 도자기를 빗던 것과 비슷하다”며 “실제 박 작가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선비정신을 추구하고자 했다고 밝힌바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마지막 공간인 ‘자연을 따르다’에서는 가야토기, 흑자 등 옛 도자기가 현대 작가 정창섭·이배·하종현의 작품과 함께 선보인다. 오 학예연구사는 “코로나19로 바깥 활동이 힘들어지면서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그 어느때보다 커진만큼 전시장에서도 자연을 한껏 느낄 수 있기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