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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중국을 방문 중인 러몬도 장관은 이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리창 총리, 허리펑 부총리를 잇달아 만났다. 리 총리는 중국 경제정책의 최고 책임자 격이다. 허 부총리는 류허 전 부총리의 뒤를 이은 경제 담당 부총리다. 둘 모두 시 주석의 최측근으로 꼽힌다. 러몬도 장관은 미국 상무장관으로는 7년 만에 중국을 방문한 인사다.
러몬도 장관은 “미국은 기후변화, 인공지능(AI), 펜타닐 문제 등에 대해 중국과 협력하기를 원한다”며 “세계는 우리가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나서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리 총리는 “건전한 경제·무역 관계는 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 했다. 러몬도 장관은 허 부총리와 만난 자리에서는 “미국은 국가 안보 문제에서는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중국과 디커플링(탈동조화)을 추구하거나 중국의 경제 발전을 저해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허 부총리는 “러몬도 장관과 함께 일할 준비가 돼 있다”며 “미국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을 펼치기를 바란다”고 했다.
러몬도 장관은 이날 오전에는 후허핑 중국 문화여유부장을 만나 내년 상반기 중국에서 제14차 중미 관광 리더십 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미국 상무부는 “두 나라간 관광 협력을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전했다.
러몬도 장관은 아울러 전날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과 만나 수출 통제 시행 정보 교환을 위한 차관보급 대화 플랫폼을 만들기로 했고, 실제 양국 차관보급 인사들은 이날 첫 회의를 열었다. 미국에서는 매튜 액설로드 상무부 수출 집행 담당 차관보가 참석했다.
러몬도 장관의 3박4일 방중 일정이 주목 받는 것은 양국간 통상 갈등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반도체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는 포괄적인 수출 통제 정책을 발표했다. 지난 9월에는 반도체, 양자컴퓨팅, 인공지능(AI) 관련 투자를 규제하는 행정명령까지 내놓았다. 미국은 이른바 ‘마당은 좁게 담장은 높게’(small yard, high fence) 원칙에 따라 중국과 무역 관계를 유지하되, 첨단 기술에 대해서는 접근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해 왔다. 이에 중국은 미국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을 제재하고, 차세대 반도체 원료인 갈륨 등에 대한 수출을 통제하며 맞대응했다.
이런 와중에 러몬도 장관이 최고위 경제 인사인 리 총리, 허 부총리와 만나면서 갈등을 완화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회동을 두고 “두 나라가 오랜 관계 악화를 멈추고 소통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전했다.
미국이 대중(對中) 전략을 총괄하는 ‘차이나 하우스’ 국무부 중국조정실 수장에 마크 램버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를 선임했다는 보도 역시 두 나라간 대화 모드가 무르익을 수 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로이터통신은 “램버트 부차관보가 지난 6월 사임한 릭 워터스 전 국무부 중국·대만 부차관보의 자리를 채울 것”이라고 전했다. 워터스 전 부차관보는 지난해 12월 중국조정실 창설 때부터 수장으로 있었는데,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중 해빙 언급과 함께 지난 6월 사임을 표했다. 이는 웬디 셔먼 전 국무부 부장관, 로라 로젠버그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국·대만 담당 선임국장의 사임과 함께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 전략이 변화하는 방증이라는 해석을 낳았다. 강경 인사들을 경질하며 중국과 대화를 본격화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제재 대상이 된 마이크론이 신임 중국 대관 업무 책임자로 제프 리(리신밍)를 임명한 것도 중국과의 관계 개선 신호탄으로 읽힌다. 이번 임명 발표는 러몬도 장관이 마이크론 문제를 중국 측에 제기한 직후 나왔다.
그러나 두 나라간 통상 논의가 여전히 평행선을 달릴 수 있다는 우려 역시 있다. 러몬도 장관은 전날 회의 뒤 첨단 기술 수출 통제 관련 대화를 두고 “수출 통제 집행과 관련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며 “국가 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타협하거나 협상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