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한 A씨의 아버지는 이렇게 울분을 토했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스포츠센터에서 일했던 A씨는 지난달 31일 센터의 대표인 40대 B씨에게서 폭행당해 숨진 20대 남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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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안일한 초동 대응이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신고를 접수하고 출동한 경찰이 하의가 벗겨진 채 쓰러져 있는 피해자 A씨를 보고도 별 조치 없이 현장을 떠난 사실이 확인돼서다. 하의가 벗겨진 정황 등을 고려해 경찰이 적극적인 조치를 했다면 A씨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란 원성이 유족들에게서 나왔다.
경찰 등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새벽 2시10분쯤 만취 상태였던 B씨는 “어떤 남자가 누나를 폭행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폭행했다는 남성도, 피해 여성도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이 추궁하자 B씨는 “내가 언제 누나라고 했느냐”라며 횡설수설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현장에서 하의가 벗겨진 채 의식을 잃고 쓰러진 A씨를 발견했다. B씨는 경찰에 “직원인데 술 취해 자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폐쇄회로(CC)TV 확인 요청도 거부했다. 경찰은 A씨가 살아 있다는 반응을 확인한 후 하체를 패딩으로 덮어준 뒤 현장에서 철수했다.
7시간 후인 31일 오전 9시쯤 ‘A씨가 숨을 거뒀다’는 B씨의 신고가 119에 접수됐다. 경찰은 B씨를 폭행치사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이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이 “A씨가 70cm 막대에 항문이 찔려 장기가 손상돼 숨진 것 같다”라는 1차 부검 소견을 내놓자 경찰은 혐의를 살인으로 바꿔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서울서부지법은 지난 2일 “도망 우려가 있다”며 B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인천 층간 소음 사건’에 이어…경찰 ‘부실 대응’ 논란
지난 11월 ‘인천 층간 소음 흉기 난동’, ‘중구 신변보호 여성 살해 사건’ 등으로 뭇매를 맞았던 경찰이 대응력을 높이겠다고 공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 사건이 발생했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지난달 31일 신년사에서 “부적절한 업무처리로 국민을 제대로 지켜 드리지 못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위기의식에 기반한 성찰도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이 무색해졌다.
참고인 신분으로 경찰에 이날 출석한 A씨의 아버지는 “정황상 수상하다고 생각해야지, 술 취해 누워있는 상황을 보고 술에 취해서 미친놈 취급해서 가버린 것이 제일 미흡했다”고 하소연했다. A씨의 누나도 “술 취한 사람이 횡설수설하면서 신고했다는데 이 사람(B씨) 말만 믿고 (경찰이) 돌아간 것도 이해가 안된다”고 덧붙였다.
최관호 서울경찰청장은 지난 3일 기자간담회에서 “우리 경찰관이 옷을 덮어주고 깨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살인범죄인지 가능성은 어려웠지 않았겠느냐는 게 우선적인 생각”이라며 “신고 내용이라든지 당시 현장 상황, 신고자인 피의자 진술 등에 비춰볼 때 그렇다”고 항변했다. 다만 최 청장은 “그럼에도 국민의 관점에서 미비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 중에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는 사실 관계를 먼저 확인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만약 폭행이 일어났다고 합리적인 의심을 충분히 품을만한 상황임에도, 신고자의 말만 믿고 그 현장을 이탈했다면 (경찰을) 비판할 수 있다”면서도 “결과로 보면 상당히 불행한 일이 발생했지만, 출동 당시 범죄 정황이 없었다면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B씨로부터 임의제출 받은 휴대전화와 차량 블랙박스 등을 분석해 정확한 범행 경위와 동기를 수사하고 조만간 B씨를 송치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