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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조양호 회장은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1949년 3월8일 인천에서 태어났다. 조 회장은 경복고와 인하대 산업공항과를 졸업한 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 한진정보통신 사장을 거쳐 1992년 대한항공 사장에, 1999년 대한항공 회장에 차례로 올랐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을 세계적 항공사로 키우는 역할을 했다. 1990년 3월 모스크바 정기 노선을 개설한 이래 시드니, 상파울루, 카이로, 베이징, 칭다오, 텐진, 선양 노선에 잇따라 취항하며 5대양 6대주를 아우르는 노선망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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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 테러 사태로 항공산업이 위축됐을 때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선제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2003년에는 A380 초대형 차세대 항공기를, 2005년에는 보잉787 차세대 항공기 도입을 연이어 결정했다. 이같은 투자는 2006년부터 회복된 항공산업 경기에 맞춰 대한항공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는 평가다.
조 회장 취임 5년 만인 2004년에는 대한항공이 국제항공운송협회(IATA)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항공수송통계 국제항공화물수송 부문 1위를 기록했다. 당시 19년 동안 이 부문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해온 독일 루프트한자항공을 제쳤기 때문에 세계 항공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대한항공은 2010년까지 6년 연속 1위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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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회장은 오는 6월 1일부터 3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IATA 제75차 연차총회를 유치하기도 했다. 조 회장은 IATA의 최고 정책심의 및 의결기구의 위원직을 20년 가까이 맡았다. 이는 사상 최초로 대한민국에서 IATA 연차총회를 개최하는데 큰 힘이 됐다는 평가다.
1969년 조중훈 창업주가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던 당시 8대뿐이던 항공기는 50주년을 맞은 올해 166대로 증가했으며, 일본 3개 도시에 취항하던 국제선 노선은 43개국 111개 도시로 확대됐다. 국제선 여객 운항 횟수는 154배 늘었고, 연간 수송 여객 숫자 38배, 화물 수송량은 538배 성장했다. 매출액과 자산은 각각 3500배, 4280배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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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을 앞세운 조 회장은 한진그룹을 육해공 물류를 모두 아우르는 글로벌 물류 전문 기업으로 키워냈다. 한진(육상운송), 한진해운(해운), 대한항공(항공)의 삼각편대는 전 세계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를 누볐다.
그러나 조 회장의 말년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진해운은 외부에서 영입한 전문경영인들의 잇따른 오판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다. 조 회장은 한진해운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2013년부터 구원투수로 나서 1조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했다. 2014년에는 한진해운 회장직에 오르고, 2016년 자율협약 신청 이후 사재도 출연했다.
이같은 전방위 노력은 채권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한진해운은 2016년 법정관리에 이어 2017년 청산됐다. 육해공 글로벌 물류 전문 기업의 한 축이 무너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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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관련된 악재도 연달아 터졌다. 2014년에는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태로 논란의 중심에 섰고, 지난해에는 차녀 조현민 전 진에어 부사장의 ‘물컵’ 사태로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부인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도 직원 폭행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잇단 갑질 논란은 조 회장의 대한항공 회장 연임 실패로 이어졌다. 지난달 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이 조 회장의 연임을 반대했고, 소액주주들의 표를 모은 시민단체에서도 소액주주들의 표를 모아 반대표를 행사했다. 연임안은 찬성 64.1%, 반대 35.9%로 부결됐다.
한진그룹은 이날 “조 회장은 평생 가장 사랑하고 동경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하늘로 다시 돌아갔다”며 “하지만 조 회장이 만들어 놓은 대한항공의 유산들은 영원히 살아 숨쉬며 대한항공과 함께 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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