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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분산·여전한 먹튀우려·불리한 지배구조
우선 증권가에선 행동주의 펀드들의 주주제안이 갈려 표가 분산됐다는 점을 패착 요인으로 짚는다. 주당 배당금 액수부터 사외이사 추천 후보들도 제각각이었다. 플래쉬라이트캐피털파트너스(FCP)는 1만원을 제안한 반면, 안다자산운용은 7867원을 제시했다. 양사는 배당금 액수를 두고 의견 조율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각각 다른 안을 KT&G 측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자산운용사 본부장 A씨는 “행동주의 펀드를 다 합쳐봐야 의결권이 얼마 되지 않는다. 개인투자자랑 똑같다고 보면 된다”며 “이런 가운데 주주제안마저 소규모로 분산, 난립한 부분도 안건이 가로막히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봤다.
납득하기 어려운 주주제안 안건도 시장의 외면을 받았다는 평가다. FCP는 KT&G에 1조2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사들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다른 시장 관계자 B씨는 “운용역들도 행동주의 펀드들의 제안을 분석하면서 어떤 안건은 찬성하기 어렵겠다, 혹은 너무 과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며 “잉여 현금이 있더라도 회사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투자를 계획할 수 있는데, 이를 일거에 털어먹으려는 시도로 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자산 운용사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관련 부서 관계자 C씨는 “타 기업과의 형평성 측면에서 배당을 비롯해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 수준이 좀 과하지 않았나 싶다”고 밝혔다.
여전한 먹튀 우려도 이번 주주총회에서 행동주의 펀드 발목을 잡았다. 조병준 신한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CIO)은 “에스엠(041510) 같은 경우 주가가 15만원을 넘었다 9만원까지 급락하는 등 행동주의 펀드 개입 과정에서 주식투자자들이 피해를 입기도 한다”며 “주주가치를 높이고 권익을 증대한다는 선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행동주의 뒤에서 자본차익을 노리는 투기 세력이 있어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한국 기업들의 지배구조 자체가 행동주의를 펼치기에는 불리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은 기관투자자 지분율이 70%에 달할 정도로 높은 반면 한국은 20%대에 그친다. 한 자산운용사 본부장 D씨는 “기관투자자들은 개인이 맡긴 돈을 운용하기에 고객과 철저하게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며 “이런 구조에선 모든 의사결정이 주주를 위한 것으로 귀결되는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주주들이 판을 뒤집기가 쉽지만은 않다”고 짚었다. 기관투자자 비중이 낮은 한국 기업 경영진을 상대로 투표를 통해 주주제안을 관철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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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주의 펀드가 시장에 남긴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주의 펀드들의 공격적인 주주제안에는 의미가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 기업들의 고질적인 낮은 배당에 대한 문제를 환기시켰다는 것이다. A 본부장은 “우리나라는 특히 금융위기나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현금 없는 기업들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체감한 탓에 배당 성향이 낮다”며 “이로 인해 기업가치가 저평가되는 만큼 행동주의 펀드들이 배당을 늘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낮은 수준의 배당성향을 올리고 꾸준히 높게 유지하라는 행동주의 펀드들의 주장은 유의미하다는 얘기다.
행동주의 펀드의 지향점은 워런 버핏의 행동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장기투자하면서 주주를 위한 방향으로 경영진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설명이다. D 본부장은 “흔히 말하는 들어왔다 털고 나가는 헤지펀드와는 다른 형태의 행동주의”라며 “장기적으로도 일반 투자자들은 주주를 위한 의사결정을 하는 쪽에 서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조 CIO 역시 “행동주의 펀드들이 꼭 기업에 적대적인 태도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며 “소수 지분을 들고 있는 행동주의 펀드 제안이 단기적으로는 주주 이익을 도모하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성장동력을 갉아먹거나 정상적인 경영 행위를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