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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월 연준 시대]①트럼프는 왜 애매한 그를 선택했나

안승찬 기자I 2017.11.02 15:45:27

눈에 띄지 않는 온건파..회의서도 반대 없이 대세 순응형
공화당은 테일러 교수 지지했지만, 매파 성향이 발목
옐런 스타일 유지 원한 트럼프가 ‘옐런 복제’ 파월 낙점
어쨌든 공화당원인 데다 트럼프 입맛 따라 움직일 가능성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차기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에 제롬 파월 연준 이사를 사실상 지명했다. /AFP


[뉴욕=이데일리 안승찬 특파원]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이사는 온건하고 무난한 사람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하는 평가다. 리처드 피셔 전 댈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한번은 파월 이사와 저녁을 먹으면서 와인을 마셨는데, 아무리 권해도 두잔 이상을 마시지 않더라”라고 소개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치우치는 걸 싫어하고 항상 적당한 수준을 유지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살아온 인생이 그렇다. 그는 공화당원이다. 조지 W. 부시 정부 때 재무부 차관을 지냈다. 그런데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그를 연준 이사로 임명했다.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공화당원을 연준 이사로 임명한 건 1988년 이후 23년만의 일이다. 공화당 소속이지만 민주당에서의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정치색이 강한 인물이 아니다.

연준 활동에서도 이런 성향이 드러난다. 지난 2012년 연준이 3차 양적완화(QE)를 결정할 때 파월 이사는 반대 의견을 냈지만, 참석한 위원들이 양적완화를 결정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모이자 그는 곧바로 순응했다. 이후 연준의 모든 의사 결정에 한 번도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다. 날고 기는 경제학자들이 넘쳐나는 연준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 출신 이사의 한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그는 연준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이 아니었고 대세에 거스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온건하고 무난한 파월 이사가 처음부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눈에 띄었을 리 없다. 공화당은 처음부터 존 테일러 스탠퍼드대 교수를 강력하게 밀었다. 테일러 교수는 공화당원들이 국회 청문회 때 옐런 의장을 비판하려고 단골로 부르던 인물이다. 그만큼 코드가 잘 맞는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테일러 교수는 내가 보증한다”라고까지 했다. 객관적 전력도 뛰어나다. 테일러 교수는 통화정책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다. 정치색이 맞고 선명한 스타일의 테일러 교수를 만난 트럼프 대통령도 상당한 호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 이사를 선택했다. 1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은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파월 이사에게 차기 연준 의장 지명을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온건주의자를 선택했을까.

◇ 옐런은 어쨌든 오바마 사람..테일러는 매파라 싫어

제롬 파월 연준 이사(왼쪽)와 재닛 옐런 연준 의장(가운데), 존 테일러 스탠퍼드대 교수(오른쪽) /AFP
‘누가 연준 의장에 가장 적합한가’란 기준으로 보면 사실 재닛 옐런 의장을 따라올 자가 없다는 평가가 많다. 로이터가 40여명의 이코노미스트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 차기 의장으로 최선은 옐런이라고 답한 사람이 응답자의 3분의 2에 달했다. 거의 모든 조사에서 옐런 의장은 시장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오랜 저금리 기조를 끝내고 긴축으로 돌아서는 쉽지 않은 과제를 시장의 큰 충격 없이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녀를 정말 좋아한다”, “훌륭하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이유다.

정권 교체가 이뤄지더라도 연준 의장만큼은 정파를 고려하지 않고 연임시키는 게 미국의 전통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애초부터 전통 따위는 안중에 없는 인물이다. 그는 어쨌든 자신의 업적을 만들고 싶었다. 옐런 의장은 민주당원이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인물이다. 오바마의 유산인 옐런 의장을 계속 끌고 가는 건 트럼프의 스타일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옐런을 아주 좋아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 싶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옐런 의장에 대해선 공화당의 반대가 심했다. 옐런 의장은 금융규제 완화에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금융규제를 함부로 풀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지난 8월 잭슨홀에서 오바마 정부 때 도입한 금융규제 강화법 ‘도드-프랭크법’을 옹호하면서 금융규제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공화당원들은 이걸 특히 싫어했다. 친(親)월스트리트 성향의 공화당은 다른 사람을 몰라도 옐런 의장만큼은 안 된다며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옐런 의장을 배제하자 트럼프 대통령의 선택지는 사실상 둘로 좁혀졌다. 파월 이사와 테일러 교수다. 테일러 교수는 공화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테일러 교수가 연준 의장이 되면 연준의 긴축 기조가 빨리질 것이란 우려가 발목을 잡았다.

테일러 교수는 ‘테일러 준칙’의 창시자다. 중앙은행이 멋대로 기준금리를 결정할 게 아니라 일정한 공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준칙에 따르면 기준금리를 지금보다 빨리 올려야 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다양한 가정을 적용해도 테일러 준칙에 따르면 기준금리가 지금보다 높아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철저한 시장주의자인 테일러 교수는 중앙은행의 인위적인 양적완화에도 반대한다. 테일러 교수가 확실한 매파(긴축적 통화정책 선호)로 통하는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은 스스로 ‘저금리 인간(a low-interest-rate person)’이라고 부른다.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답게 금리가 낮고 시중에 돈이 넘쳐나는 상황을 좋아한다. 그가 옐런 의장을 칭찬했을 때도 “그녀도 저금리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도 느리고 점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매파라면 딱 질색이다. 블룸버그통신은 “급격한 긴축은 3% 성장을 목표로 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지 않는 결과”라고 분석했다.

◇ “온건한 파월이라면 말 잘 들을 것”

온건하고 무난한 성향의 파월 이사가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낙점을 받았다. /사진=연준
파월 이사의 발탁은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의 추천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므누신 장관은 파월 이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월 이사는 재무부 차관을 거친 이후 미국 대형 사모펀드인 칼라일그룹에서 8년간 파트너로 일했다. 골드만삭스 출신인 므누신 장관과 월스트리트에서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정치전문 온라인매체 폴리티코는 백악관의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므누신 장관이 파월 이사를 편하게 생각했다”면서 “특히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고 전했다. 파월 이사는 온건한 인물이다. 자신의 주장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파월 이사라면 트럼프 정부의 요구 사항을 연준 의사 결정에 반영할 수 있는 인물로 판단한 셈이다. 노무라증권도 “파월 이사가 경제학 전공이 아니고 그동안 연준 회의에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았던 점 등에 비춰 보면 연준 의장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입김이 앞으로 커질 소지가 있다”고 전망했다.

게다가 파월 이사는 현직 연준 이사다. 옐런 의장이 어떻게 연준을 이끌었는지 옆에서 지켜봤던 인물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마음에 들었던 옐런의 점진적 긴축 기조를 확실히 이어갈 수 있는 인물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옐런의 복제”라고 평가할 정도다. 금융규제 완화에 대해서는 트럼프 대통령과 생각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지만, 옐런 의장보다 열린 입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파월 이사는 입맛에 딱 맞는 선택은 아니지만,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다. 파월 이사는 상대적으로 비둘기파에 가깝다. 파월 이사의 지명은 시장에 옐런 스타일의 연준이 이어진다는 안정감을 줄 수 있다. 파월 이사라면 시장은 반가워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쨌든 공화당원이다. 연준을 바꿨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게다가 온건한 그의 스타일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잘 들을 가능성도 있다. 금융규제 완화라는 트럼프 정부의 목표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렸다.

미국의 정책연구소인 비콘정책어드바이저스(Beacon Policy Advisors)는 “파월 이사는 옐런 의장의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트럼프’ 브랜드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온건하고 무난한 파월 이사가 트럼프라는 옷으로 갈아 입고 세계경제대통령 자리에 올라서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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